스토리1

[스크랩] `총무`분주⑤~67p(법련 2008년 5월)

박청춘1 2008. 5. 23. 08:22

회장 취임 48주년인 5월 3일.
앞으로 2년 후에 '영광스런 50주년'의 개가가!
창가는 '승리'해야 한다.
사제의 '5·3'부터 노도와 같은 전진,
출옥과 입옥의 달 '사제의 7월'을 목표로!
"투쟁할 때는 아수라와 같이 싸워라."   은사 도다 제2대 회장의 유언이었다.
승리를 여는 열쇠는 무엇인가.  목숨 걸고 은사를 모시던 제자는 그 열쇠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가."
"'무엇과' 투쟁하는가."
투쟁하는 목적, 목표, 상대.   이 세 가지를 명쾌하게 정하고 싸운다.
그리고 적조차 또 악귀 마민(魔民) 까지 내 편으로 바꾼다.  이것이 창가 상승(常勝)의 방정식이다.
'사제승리를 위해 싸운다.'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싸운다!'
이런 근본 목적을 가르쳐 주셨지요.
도다 선생님이 서거하신 후 실질적으로 학회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신 분은 이케다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직은 어디까지나 청년부 실장이었고 총무였습니다.   가시와바라 씨는 말했습니다.
"정말 죄송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케다 선생님에게 학회를 지휘해 주십사 하고 부탁드렸습니다.
허나 선생님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셨지요.  그래도 재삼 간청해 가까스로 양해를 얻었습니다.
선생님이 투쟁의 중심이 되어 주지 않으셨다면 학회는 세상의 평판처럼 공중본해했을 것입니다.
그 위기에서 구해주신 분이 선생님이었습니다."
(이케다)선생님은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간사이 사람은 순수합니다.  그래서 간사이는 무엇이든 내던지고 싸울 수 있지요.
도쿄 사람들도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싸운다는 각오가 없으면 안 됩니다."
학회에 '5·3'은 사제의 날이다.   그리고 완승을 향해 출발하는 날이다.
은사가 서거하고 1년 후인 5월 3일이었다.
그날을 맞이하기 전 이케다 총무는 청년부 간부에게 말했다.
"도다 선생님이 회장에 취임하신 날이 5월 3일입니다.  서거하신 날은 4월 2일입니다.
불법은 날짜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3일'에 시작해 '2일'에 끝나고 있지요.
이번 투쟁도 5월 3일의 총회를 시작으로 마지막은 6월 2일입니다. 3일에 시작해 2일에 끝납니다.
이번 투쟁에서 우리가 싸우는 모습을 도다 선생님이 지켜보십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다 선생님이 힘차게 지휘해 주고 계심을 깊이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승리합니다!"   불가사의한 승리의 리듬이 이미 흐르고 있었다.
이케다 실장이 '총무'에 취임한 지 벌써 열 달.
총무는 전국을 순회했다.  제일선의 멤버에게 격려와 희망, 그리고 용기를 보냈다.
'투쟁의 호흡'을 누구에게 맞추는가.  이미 승리의 호흡은 전국에 널리 미치고 있었다.
이케다 선생님은 승리의 리듬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첫번째는 어서를 근본으로 한 투쟁입니다.
두번째는 철저한 개인지도입니다.
세번째는 청년부를 추진력으로 삼으신 점입니다.
선생님 투쟁은 전광석화와 같았습니다.  회의를 길게 하거나 느긋하게 투쟁한 기억이 없습니다.
하나하나 사안이 착착 정확하게 결정되었지요.   현장 상황까지 전부 파악한 선생님 지시는
마치 토양이 물을 흡수하듯 제일선에 스며들었습니다.
거만한 간부에게 실망한 저는 선생님에게 지도를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힘차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투쟁은 자신이 복운을 쌓고 행복해지기 위함입니다.  나와(이케다 선생님) 함께 싸웁시다."
선생님은 어디까지나 신심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철저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분쿄의 다나카 지부장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케다 선생님에게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일어서서 
선생님에게 배운 것을 실천할 때입니다.  제자가 출진할 때입니다."
"'설마가 실현'이라 일컫는 오사카 투쟁도 끝까지 불경보살과 같은 마음으로 철저히 실천했기 때문에 승리했다."
(이케다 SGI회장)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민중'이다.  '투쟁하는 마음'이다.
현장이 즐거운지, 활동하기 편한지, 보람을 느끼는지….
이케다 총무의 관점은 늘 '현장'에 있었다.
1956년 선거전 때, 도다 선생님은 이케다 선생님에게  "오사카는 힘든 싸움이다.  이곳이 승리한다면 만만세다. 
다이, 맡아 주게나."라는 말씀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기꺼이 싸우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이케다 선생님에게
도다 선생님은  "몸은 괜찮은가?"라고 물으셨습니다.  "네, 괜찮습니다."하고 즉각 대답하시는 선생님.
그 모습은 멋진 '사제의 드라마' 같은 한 장면이었다고 남편은 말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부드럽게 말씀하셨지요.
"앞으로는 모든 것을 다이사쿠와 의논하게나."
가시와바라 씨는 도다 선생님에게 낙선을 보고드리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을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에게 보고드리자 선생님이 낙담하시는 모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모두 울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 죄송합니다.'라는 말씀밖에 못 드렸다. 
얼마 동안 회장실에 누구도 다가서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패배 이후, 도다 선생님 병세가 심각해 졌다. 나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패배한 채로 도다 선생님을 영산으로 떠나보내고 말았다.
내가 야무지지 못해 도다 선생님 수명이 줄어들고 말았다.   도다 선생님이 살아 계신 동안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했다.'"   스승에게 보답하지 못해서 얼마나 비참한지…….
다음 선거에 후보자로 결정된 가시와바라 씨는 "나는 힘이 없다. 도다 선생님의 치욕을 갚기 위해 
이번 투쟁은 이케다 선생님에게 부탁드리는 수밖에 없다."하고 말했지요.
가시와바라 씨가 이케다 선생님과 함께 도다 선생님의 묘를 참배했을 때의 일입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가시와바라 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투쟁은 설욕전입니다.  도다 선생님을 위해 반드시 설욕합시다.  그것이 선생님에 대한 보은입니다."
그 말씀이 가시와바라 씨에게 '백 배의 용기'가 되었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말한다. "총마무리하는 4년 동안이 중요하다." 사제의 총마무리 때에 들어서고 있다.(2007년 4월 소카대학교)
당시 사실무근한 죄로 인한 '오사카 사건' 재판이 계속 되고 있었다.(중략)
1958년 봄, 서거하시기 직전에 은사는 재판을 받으러 가는 이케다 실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재판은 쉽지 않은 싸움일 것이다.  그러나 최후에는 이긴다.  금은 금이다.
아무리 진흙투성이로 만들어도 그 광채를 어찌 잃겠는가.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
유유하고 당당하게, 그리고 남자답게 싸우고 오너라."
이케다 총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 검은 권력은 1959년의 참의원 선거 때도 꿈틀댔다.
그러나 총무는 정의의 깃발을 당당히 내걸고 서민의 행복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만일 그 투쟁에서 졌다면 학회는 검은 음모의 제물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속에서 선생님은 정정당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뇌하는 동지들을 철저하게 개인지도하셨습니다.
활동을 하는 데 무엇이 중요한가….  도다 제2대 회장은 이렇게 유언했다.
"후회 없는 활동은 사전 작전에 달려있다. 앞으로 장래 광선유포의 활동도 이 원리를 잊으면 안 된다."
또 은사는 '지혜'의 소중함을 역설했다.
"잘 생각해 보게. 머리를 써서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게나. 대부분의 승부는 작전 단계에서 결정되고 만다."
니치다이강당 정면에는 도다 제2대 회장 유영이 걸려 있고, 그 양옆에 은사가 지은 시 두 수가 걸려 있었다.
"삼류의 강적 있어도 사자의 자식은 광포의 여로에 용감하게 일어서라."
"괴로워도 한탄하지 마라, 벗이여 장래 광선유포의 낙토를 보라."
그 자리에서 이케다 총무는 명쾌하게 말했다.
"이번 지망 선거에서 학회가 상당히 우수한 성과를 올렸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창가학회를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비판은 자유지만 우리 창가학회는 신심을 근본으로 한 세계 최고의 종교 단체입니다.   절대로 정치 단체가 아닙니다.
창가학회는 어디까지나 중도법상(中道法相)의 길을 나아갑니다.
춘계총회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니치다이 강당 관계자나 이웃을 소중히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학회에 대한 편견 때문에 강당을 빌려 주기 싫은 표정이었지만, 점점 학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협력 해 주었습니다.
강당 사무실에서 이케다 선생님 강연을 들었는지,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도
"드디어 이케다 씨가 학회를 짊어지고 일어서겠군."하고 말했습니다.
학회 편을 만드는 선생님 투쟁이 유사시에 열매를 맺는 데 감동했습니다.
이케다 총무는 이렇게 덧붙였다.
"도다 선생님은 모든 주의나 사상을 완벽하게 지도하는 일이 우리 학회 사명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광선유포의 지휘를 잡으신 날은 지난해 3월 16일이었습니다.
이날은 기시 총리 가족이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때 도다 선생님이 
'광선유포의 모의시험을 해 두자'하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병세가 깊은 몸이었지만 광선유포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서거하신 것입니다.
남아 있는 우리는 어디까지나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광선유포를 지휘한 모습을 가슴에 새겨,
선생님이 모의시험을 해 두자고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광선유포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전진했으면 합니다.
마침내 준엄한 신심을 토대로 일치단결하고 세찬 기세로 승리해 선생님에게 보고드리지 않겠습니까."
춘계총회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1958년 3월에 도다 선생님이 목숨을 걸고 광선유포 모의시험을 해 준 일을 언급하셨습니다.
"반드시 광선유포 할 수 있다."라는 선생님 말씀을 듣는 순간, '3·16'에서 도다 선생님에게 한 맹세가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불가사의할 정도로 용기가 넘쳤습니다.  투쟁에 승리해야 사제가 승리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세찬 기세로 승리해 회장 선생님에게 보고 드리자."
이케다 선생님 외침에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승리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기백과 대확신이 가득 찬 선생님 지도에 눈이 번쩍 뜨이는 듯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추진하는 투쟁은 정치적인 차원을 훨씬 능가한 가장 숭고한 투쟁임을 가르쳐 주셨지요.
제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약한 마음이 단숨에 사라지고 자신감과 확신, 용기 그리고 기쁨이 싹텄습니다.(중략)
당일 이케다 선생님이 여자부에게 주신 시를 다다 도키코 여자부장이 전했습니다.
"전군(全軍)을, 백마를 타고 지휘하라. 그대의 선도(先導) 은사도 칭찬하리라."
모두 폭발적으로 기뻐했습니다.  모두 일념이 바뀌었습니다.
저희 여자부는 선생님과 마음을 하나로 하여 싸웠습니다.
춘계총회에서는 이케다 총무가 중심이 되어 은사 도다 제2대 회장의 강연 녹음 테이프를 음반으로 제작한다는 소식도 발표되었다.
"음반을 만드는 근본 의의는 도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강연, 사상, 이념을 올바르게 영구히 학회의 근본 지침으로 전하기 위함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학회가 올바른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장래 모든 지도는 이 속에 있습니다."  이케다 총무의 말이다.
사제가 없으면 광선유포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투쟁에 승리하지 않고 사제를 증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총무의 마음이었다.
춘계총회에서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 도다 선생님"이라고 여러 번 외치셨습니다.
그 지도를 들으면서 1년 전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도다 선생님 장례식을 치룬 뒤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저희 몇몇 여자부원들은 이케다 선생님과 간담을 나눴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여러분 머릿속은 자기 일로 꽉 차 있지요? 그러나 저는 도다 선생님 말씀이 온몸에 흐르고 있어요. 그 생각뿐입니다."
그 말씀에서 느껴지는 깊이와 무게감. 목숨을 건 사제의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또 눈물이 많은 저는 무슨 일만 있으면 금방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 저에게 선생님은
"울고 싶은 심정은 잘 알아요. 그러나 울면 안 됩니다.  인생에서 딱 두 번만 울면 됩니다.
스승과 이별했을 때와 광선유포가 되었을 때입니다."라고 지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지요.
"그러나 나는 스승과 이별할 때도 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제는 이 정도로 준엄한가 하며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제가 승리하도록 투쟁하시는 이케다 선생님을 뒤따르자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총회가 끝난 저녁, 운영을 담당한 조토 지부의 오구로 가즈에 씨 기사가 당시 세이쿄 신문에 실렸다.
"춘계총회를 담당하는 지부의 중심자로 활약. 나는 구의원 선거에 입후보해 당선.
'처음에는 총회 담당과 선거로 올해는 힘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월 12일에 
이케다 선생님에게 '여명'이라고 적힌 엽서를 받았습니다.  그 의미는 잘 몰랐지만
답답하고 어두운 마음에서 여명이 보여 두 가지 커다란 고뇌가 새로운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명의 추위가 심할수록 날씨가 맑지요.  즉 고뇌가 클수록 행복이 크다고 마음을 정하고, 총회나 선거에도 
한없는 자신의 복운과 환희를 느꼈습니다.'"
이케다 총무는 이 해를 '여명의 해'로 명명했다.   당시 청년부 간부는 이렇게 말한다.
"이케다 선생님은 올초에 '올해는 여명의 해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여명'의 의미도 이번 투쟁 여하에 따라 진정한 일본의 여명이 되느냐, 세계의 여명이 되느냐가 결정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춘계총회 다음 날에는 아키시마시 지구부장에게 격려 엽서를 썼다.
"'사자왕과 같은 마음을 지닌 자, 반드시 부처가 되느니라.'는 성훈을 몸으로 실천할 때입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이번 싸움에 심혈을 기울여 모든 회원을 지도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세이부를 부탁합니다."
5월 5일 오후, 이케다 총무는 청년부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매우 바쁜 이케다 총무였지만 청년을 위해 시간을 만들었다.
총무는 아무리 험난한 투쟁이라도 한 사람의 동지를 소중히 여겼다.
동지의 기쁨에 진심 어린 응원을 보냈다.  그것이 총무의 마음이었다.
소설 <신 인간혁명>에도 그때 일이 나와 있다.
"두 사람이 결혼을 보고하러 왔을 때, 신이치는 말했다.
'그런가, 축하하네. 도다 선생님이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 하셨을까…….'"
청년을 더없이 사랑하고 청년의 성장에 만감의 기대를 보내는 스승,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그것이 창가 사제의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이케다 선생님이 참석하여 회합은 폭발적인 반응응 보였습니다.
선생님 지도에 감명한 저는 그날 밤, 지도 내용을  일기에 적었습니다.
"독일에는 '정의로 일어서면 힘은 두 배가 되리라'는 격언이 있다.  우리 창가학회는 정법에 따라 일어섰다.
두 배뿐 아니라 세 배, 다섯 배, 몇십 배의 힘이 나오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어서에도 주나라 무왕이 800명으로 70만 기(騎 : 말탄 병사)의 은나라 주왕을 물리쳤다고 나와 있다."
"윤타왕은 백마의 울음 소리를 듣고 힘이 솟았습니다.  우리는 어본존 덕분에 힘이 솟습니다."(중략)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신심으로 일어서면 있는 힘을 몇 배로 더 발휘할 수 있다.'라는 확신에
저희도 힘이 솟았습니다.
서민의 마을 스미다구 무코지마에서 장례식이 열렸다.(중략)
지부 차원의 장례를 제안한 사람은 이케다 총무였다. 총무는 공로가 있는 동지를 위해 바쁜 가운데 직접 
지부장(葬) 준비에 손을 썼다. 설령 어떤 상황이라 해도 벗 한 사람 한 사람을 철저하게 소중히 여긴다.
창가의 전진이나 승리도 창가 가족의 그런 따스함 속에서만 존재한다.
당시 세이쿄 신문에는 "무코지마가 있는 한, 학회가 전진하는 한, 그 공적은 한없이 빛납니다."라는 선생님의 짧은 말이 실렸습니다.
선생님은 철저하게 뒤에서 손을 쓰며 당시의 간부나 남편을 내세워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착실하게 광포에 면려하는 사람의 공로를 칭찬해 주셨지요.
한 사람의 벗을 껴안듯이 끝까지 지키는 선생님의 자애 어린 마음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저는 장례식 때 조사(弔辭)를 낭독했습니다.  그런데 구의원 선거에서 당선한 직후인 데다
갑작스런 일이어서 독선적으로 말하고 말았습니다.
장례가 끝난 후, 학회 본부에서 선생님을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연설과 같이 발표하는 조사는 안 됩니다.  진심이 중요합니다."라고 엄하게 지도하셨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진지한 모습을 뵈며 의원이 되어 우쭐해진 자신을 깊이 반성했습니다.
당시는 으스대는 간부들이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저도 어느새 그런 분위기에 물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은 그런 분위기를 단호히 배제하고, 광선유포를 위해 가장 고생하고 투쟁하는 제일선의
학회원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는 진정한 학회정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부 업무와 춘계총회, 회의, 지도회, 결혼식, 지부장(葬)….  이케다 총무는 다망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솔선해 동지에게 진심 어린 격려를 보냈다.
"당당하게 지휘를 잡는 용맹한 모습으로 은사의 웃음에 그대와 보답하리라."
선생님 마음에는 도다 선생님뿐이었습니다.
"은사의 웃음에 그대와 보답하리라."는 기대에 어떻게 보답하면 좋을까…….
솔직히 1956년의 도쿄전, 1957년의 오사카 보궐선거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이제 절대로 더 질 수 없다.  선생님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다며 남편은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여자부 간부회가 열렸다.  간부회에서 이케다 총무는 말했다.
"여러분이 좌담회든 지부든 지구든,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 힘을 다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학회를 위해, 광선유포를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불도수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아무도 인정하지 않아도 어본존이 여러분을 모두 지켜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몹시 피곤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도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광선유포의 여명이기에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법전입니다.
승리해서  도다 선생님 묘 앞에 보고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진지하게 진심을 담아 여자부 손으로 추진했으면 합니다.
건강에 유의하며 큰 공덕, 커다란 숙명전환과 인간혁명을 일구는 한 달로 정하고 싸워주기 바랍니다."
"도다 선생님에게 반드시 승리한 보고를 하고 싶다."
선생님의 한 마디에 '반드시 승리한다!'라는 확신과 환희가 북받친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과 함께 싸운다는 기쁨으로 매일 정신없이 활동한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간사이는  "지면 안 돼."라는 말을 뼛 속 깊이 사무치게 새겼습니다.
이때 우리가 임한 간사이 투쟁은 스승의 치욕을 갚는다는 의미였습니다.
군마의 다카사키에서는 남자부 열 명 정도가 먼지투성이가 되어 참석했어요.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자전거를 타고 8시간이나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모두 생활에 쫓겨 교통비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회합이 끝나자 또 자전거를 타고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다카사키에 도착할 무렵에는 날이 밝겠다고 말하면서도 의기왕성했습니다.
남자부 회합이 있었을 때 그 사실을 이케다 선생님에게 보고드렸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좋다, 다카사키에 가겠네."하며 즉석에서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훗날 다카사키에 지부가 결성되었을 때 실현되었습니다.
보고드렸을 때 선생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젊을 때는 가난하고 몸도 약해 한밤 중에 아파트에 돌아가면 털썩 쓰러진 채로 아침까지 잠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 지은 시가 이것입니다."
그때 심정을 담아 시를 암송하셨습니다.
희망에 불타 노도에 맞서며
비록 가난한 몸일지라도
남이 비웃어도
꾹 참고 두고 보자………
긴 시였지만 선생님은 전문을 암송하셨습니다.
가슴속에 뜨거운 뭔가가 북받쳐 올랐습니다.  그런 저희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청년부는 모두 고생하면서 분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고생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모든 청년부원에게 주고 싶군요.  
다카사키에서 달려온 남자부원에게도 줍시다."  격려를 받은 저희는 모두 맹렬한 기세로 싸웠습니다.
힘들어도 즐겁다.  그것이 승리의 리듬이다.
이번에는 '승리할지'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제자에게 묻고 있다.
이케다 SGI 회장은 자신이 실천한 사제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길 수 있는가?   '승리하겠습니다!'
승리의 원천이 되는, 이 사제의 아침에 나눈 깊은 마음의 호흡을 나는(이케다 선생님)
후계의 청년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출처 : `총무`분주⑤~67p(법련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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