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스크랩] 법화경 방편품 강의 -16 [상대의 행복을 끝까지 바라며]
박청춘1
2009. 9. 25. 22:45
[본문] 舍利弗. 如來能. 種種分別. 巧說諸法. 言辭柔연. 悅可衆心. 舍利佛. 取要言之. 無量無邊. 未曾有法. 佛悉成就. 사리불. 여래능. 종종분별. 교설제법. 언사유연. 열가중심. 사리불. 취요언지. 무량무변. 미증유법. 불실성취. [사리불, 여래는 능히 종종으로 분별하여 교묘하게 제법을 설하고, 언사유연하여 중생의 마음을 열가케 한다. 사리불, 요를 취해서 이것을 말하면 무량무변 미증유의 법을 부처는 모두 성취하셨느니라.] [통해] 사리불이여, 여래는 많은 법을 여러가기로 잘 구별하여 교묘하게 설한다. 말은 부드럽고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사리불이여, 요점을 말하면 헤아릴 수도 없고 한계도 없는, 일찍이 없었던 법을 부처는 모두 성취하시고 있는 것이다. [어역] 분별(分別) : 여러가지 사상(事象)을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 연사유연 : 연은 연(軟)의 정자(正字). 유(柔)도 연(軟)도 '부드럽다'는 뜻. 부처의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 소리 마음을 말한다. [강의] 부처의 광대한 지혜를 찬탄하는 내용이 계속된다. 여기서는 여래가 사람들의 이해나 경우에 따라 가르침을 재치있게 설해왔던 일, 부처의 말은 부드러워서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해왔던 것을 돌이켜 보고, 결국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여래가 '헤아릴 수 없고 한게도 없는, 일찍이 없었던 법'을 가지고 읶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방편품에서 석존이 "미증유의 법"에 대한 언급하는 것은 서두에서 시작하여 이럭으로 3번째이다. 어느 것이나 부처가 온갖 중생의 고뇌에 응한 설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불(諸佛)의 지혜'가 풍부하고 깊기 때문이며, 부처가 득(得)한 '일찍이 없었던 법'은 그만큼 광대하다고 말하고 있다. ◆ 상대의 생명이 변할때까지 말하라 이 방편품에서 석존이 사리불에게 똑같은 취지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제불의 지혜'는 일체의 성문, 벽지불로서는 알지 못할 '심심무량한 법'이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지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부처는 어떻게 해서든지 사리불 등에게 전하려고 했다. 그것을 위해 부처는 '일찍이 없었던 대법(大法)'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복하여 설했던 것이다. 사리불 등이 자신의 '작은 지혜'에 만족하고 있다면 부처의 '광대한 지혜'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부처는 부처의 지혜가 얼마나 굉장한가를 간절하고 정중하게 몇번이나 설명했다. '한번 설명하였으므로 이제 충분하다'라는 것은 무자비다. 상대방의 생명이 변할 때까지 계속 말하는 것이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단지 자기만 만족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허무하다. 석존도 한마디 한마디를 설하면서 사리불의 표정 변화를 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제불의 지혜를 거듭 찬탄하면서 사리불의 흉중에서 위대한 구도심이 생기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리불 쪽에서 보면 그때까지 석존의 위대함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방편품의 설법을 듣고 부처의 지혜의 스케일에 더욱 존경의 마음을 더하게 된 것은 틀림없다. 더한층 사리불의 구도심은 높아갔다. 그 '일찍이 없었던 법'을 듣고 싶어하는 '일찍이 없었던 구도심'이 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의 행복을 끝까지 바라며 "언사유연하여 중생의 마음을 열가(悅可)케 한다" '언사유연'은 듣는 사람에게 말이 온화하고 부드럽게 한다는 뜻이다. 온화함 속에도 늠름하고 확신 있는 울림을 담은 말이 바로 '언사유언'이다. 그런 말로 사람들을 환희케 하여 여기까지 이끌어 왔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타의(髓他意)의 가르침에 대해 말한 것인데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것를 가르쳐 주고 있다. ◆ "살아있는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유언"이란 단지 부드럽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더구나 상대방에게 알랑거리는, 단지 듣기만 좋은 말과 전혀 다르다. 그것은 '상대방의 심금을 울리는 말'이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말'이다. 즉 '상대방의 기분을 이해한 말'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진실한 행복을 구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행복을 끝까지 바라는 말'이야말로 설사 강한 말일지라도 남을 구하면 진실한 말, 부드러운 말이 된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강한 말일지라도 남을 구하면 진실한 말, 부드러운 말이 된다. 비록 부드러운 말일지라도 남을 손상하는 것은 거짓말, 강한 말이 된다. 지금 시대의 학자들의 법문은 부드러운 말, 진실한 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모두 강한 말, 거짓말이다. 부처의 본의(本意)인 법화경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어서 890쪽, 통해) 겉으로는 정중한 말일지라도 사람의 마음을 파괴하는 사악(邪惡)한 말이 있다. 반대로 강한 말일지라도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충언(忠言)은 귀에 거슬리고 양약(良藥)은 입에 쓰다"라고 말씀하셨다. 달콤한 말에는 위험이 있는 법이다. ◆ 부드럽게 또한 강하게 예의와 성의와 확신을 가지고 말하라 정말로 유연한 말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표면상, 말이 강한가 부드러운가로 결정되지 않는다. 거기에 담긴 내용에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마음에 자애가 있는가 없는가로 결정된다. 지금의 사회는 '실어(實語)'가 적은 사회읻. 이해(利害)와 타산적인 말,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는 말, 향락적인 농담뿐일지도 모른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와, 상대방의 마음 오저에까지 스며드는 '진실한 말'이 없다. '진실한 말'이란 '말하고 있는 것'과 '행동하고 있는 것'이 일치하는 말이다. 자신의 신념으로 하는 말, 자신의 인생을 건 말이야말로 '진실한 말'이다. 또한 '살아있는 말'은 '생기있는 마음'에서 나온다. 닛코상인은 "유희잡담(遊戱雜談)"을 훈계하셨다. 도다 선생님도 "신(信) 없는 언론은 연기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결론으로 말하면 "언사유연"이란 '성의(誠意)'의 이명(異名)이다. 성실하고 진지하며 예절이 있다. 더구나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전하는 '말'이야말로 "언사유언"이다. '몹시 거친 말은 그 근거가 약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한 시인도 있다. 자신감이 있으면 정중한 말이 나온다. 안으로 넘치는 확신을 간직하면서 여유와 침착함 그리고 유머를 잊지 않는 당당한 대화. 이것이야말로 불법자(佛法者)의 '무기'이다. 말이 혼란해지는 것은 사회가 혼란해지는 징조다. '실어(實語)'없는 시대에 '대화'를 기조로 한 우리들의 운동은 사회의 커다란 희망이 되고 있다. |
출처 : 법화경 방편품 강의 -16 [상대의 행복을 끝까지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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