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성불(一生成佛)의 신심(信心)으로 일체를 승리의 방향으로
교학은 창가학회 정신의 골수다. 창가학회는 역대 회장과 함께 '어서(御書) 근본'으로 니치렌 대성인의 성훈대로 불법(佛法)을 실천해 오늘날 192개국으로 발전했다. 본지는 교학을 더욱 심화하기 위해 사이토 SGI 교학부장 어서강의를 이해하기 위한 연찬자료를 매월 연재한다.
<본문> 만약 심외(心外)에 도(道)를 구하여 만행만선(万行万善)을 수행(修行)함는 비유컨대 빈궁한 사람이 일야(日夜)로 이웃의 재보(財寶)를 셀지라도 반전(半錢)의 득분(得分)도 없음과 같도다. 그러므로 천태(天台)의 석(釋) 중에는 만약 마음을 관(觀)하지 않는다면 중죄(重罪)는 멸(滅)하지 않는다고 하고, 만약 마음을 관(觀)하지 않는다면 무량(無量)의 고행(苦行)으로 된다고 판정했느니라. 고로 이와 같은 사람을 불법을 배우고 외도(外道)로 된다고 창피를 주었느니라. 이로써 지관(止觀)에는 수학불교(雖學佛敎) * 환동외견(還同外見)이라 해석했느니라. 그러므로 부처의 이름을 부르고 경권을 읽고 꽃을 뿌리고 향을 피우는 것까지도 모두 나의 일념에 갖추게 되는 공덕선근이라고 신심을 취해야 할지니라. 이에 의(依)해서 정명경(淨名經)중에는 제불(諸佛)의 해탈(解脫)을 중생의 심행(心行)에 구하면 중생즉보리이며 생사즉열반이라고 밝혔느니라. 또 중생(衆生)의 마음이 더러워지면 土(토)도 더러워지고 마음이 깨끗하면 土(토)도 청정하다고 해서 정토라 하고 예토라 함도 토에 둘의 차이가 없으며 오직 우리들의 마음의 선악에 의한다고 쓰였도다.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미혹(迷惑)할 때는 중생(衆生)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 비유컨대 암경(闇鏡)도 닦으면 옥(玉)으로 보임과 같도다. 只今(지금)도 일념무명의 迷心(미심)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명경(明鏡)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어서 383쪽 11행 ~ 384쪽 6행) |
[배경] 이번달 연찬 어서는 <일생성불초>이다. <일생성불>는 우리의 신앙 목적이자 불도수행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생성불초>는 1255년 대성인께서 시모우사 지방에 사는 도키조닌에게 주신 편지라고 전해지고 있다. 니치렌불법(日蓮佛法)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남묘호렌게쿄라는 창제행을 통해 자신의 생명 속에 불계를 용현해, 그 불계의 힘으로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을 극복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일생성불'이란 범부가 이 일생동안 성불한다는 것이다. 유사한 의미로는 '즉신성불'이라는 원리가 있다. 이것은 "몸 그대로 부처가 된다" 즉 범부가 그 몸 그대로 성불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역겁수행도 아니며, 또 범부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해 성불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으로 생을 받은 이 일생 동안에 즉신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불이란 인간과 동떨어진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본래 갖춰진 불계의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며 범부의 몸 그대로 최고의 인간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성(成)이란 연다는 의의이고"(어서 753쪽)라는 어서가 있다. 성불(成佛)이란 자신의 구계의 몸에 "불계의 생명을 연다"는 뜻이다. 대성인은 모든 부처를 부처답게 만든 근원의 법을 남묘호렌게쿄라고 밝히셨다. 이 남묘호렌게쿄는 우리 생명의 법칙이기도 하다. 대성인은 우리가 남묘호레게쿄의 창제행을 시작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에 불계가 용현하는 것을 가능케 하셨다.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창제행은 자신의 생명변혁을 가능하게 하는 최고의 불도수행이다. 용현된 부처의 지혜아 자비의 생명은 자신의 생명 경해를 풍요롭게 하여 자타 모두의 행복을 실현하다. 나아가 이 자행화타의 창제가 널리 유포되면 부처의 자비의 생명에 물든 민중이 곳곳에서 일어나가 된다. 그것이 사회 자체를 바꾸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강의] 불법은 내도(內道)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 밖에서 '성불의 길'을 구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마음 밖에 길을 구해 불도수행을 한다면 절대로 '성불'은 이룰 수 없다. 즉, 성불이란 흉중의 불계가 용현한 것이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자신의 생명변혁이다. 우리의 생명에는 불계의 생명도 있지만 무명(無明)의 생명도 있다. 무명의 생명이 강하게 나타나면 삼독이 강성해지고, 그 결과 지옥 * 아귀 * 축생의 생명 경애에 휩쓸리게 되고 만다. 무명을 밝은 '명'의 방향으로 전환하고 번뇌의 고통을 보리로 열어 '구계의 현실 속의 몸에 불계의 생명을 나타내는 자신의 생명변혁'이 없으면 성불은 영원히 이룰 수 없다. 즉, 자신의 생명을 벗어난 곳에서 해결의 길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 변혁은 일을 수 없다. 자신의 생명변혁이 없기 때문에 결국 진정한 성불은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본문에서 "부처의 이름을 부르고"라고 했다. 남묘호렌게쿄는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의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제목을 봉창하는 것은 실은 니치렌 대성인의 불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기도 한다. 그 다음에 "경권을 읽고"라고 있는데, 이것 역시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독송하는 방편품 * 자아게를 읽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가 불도수행의 골격이다. 그리고 '나의 일념에 갖추게 되는 공덕선근'이라고 신심을 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또 "꽃을 뿌리고 향을 피우는 것까지도"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까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불도수행에 관련한 모든 행위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창제 * 근행이라는 근간의 수행을 비롯해 하나하나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의 공덕선근이 된다고 받아들이는 신심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모든 행위가 자동적으로 공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행위가 내 자신의 신심'이라고 받아들여야 자신의 공덕으로 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신심을 취해야 할지니라"라는 표현은 다름아닌 우리의 자세, 우리의 일념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자신의 '일념의 전환'이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이케다 SGI 회장은 <일생성불초 강의>를 통해 우리가 자신의 일념 전환은 망각한 채 '기심 밖의 법'을 보는 경우, 즉 일념을 정하지 못하는 나약한 신심의 특징을 몇 가지 언급해 주시고 있다. 첫째 책임전가의 신심, 둘째 도리, 셋째 불신 * 불평불만, 넷째 원질, 다섯째 겁내는 마음이다. 이 다섯 가지에 공통되는 점은 자신의 생명 변혁, 인간혁명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 다섯 가지에 상반되는 것은 ① 책임전가의 경우, '홀로 선다는 결의' ②도피는 '도전' ③불신 * 불평불만은 '확신 * 격려' ④원질은 '단결' ⑤겁내는 마음은 '용기'이다. 홀로서는 정신, 도전, 확신, 단결, 용기는, 생각해보면, 모두 내 자신의 일념 변혁이 없으면 있을 수 없다. 학회 지도의 요체는 바로 끊임없는 일념변혁에 있다는 말씀이다. 자신의 일념으로 일체가 결정된다. 이 점이 니치렌 대성인께서 '일생성불의 신심'이라고 가르치신 의미이다. 중생이나 부처라 해도 그 차이는 '미혹의 생명'인가 '깨달음의 생명'인가의 차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명을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생명이라고 해도 우리 범부가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대성인은 '깨달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신심의 '신(信)'이라고 하셨다. 부처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부처의 지혜, 불계의 생명을 확신하는 것이 우리 범부의 깨달음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부처의 지혜에서 멀어지는 것이 '범부의 미혹'이다. 우리의 생며에는 무명과 법성이 모두 갖춰져 있다. 즉 어느 쪽으로든 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명을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는. 그리고 어떠게 닦을 것인지가 하는 점에 창제행의 의의가 있다. 말법이라는 시대는 가만히 내벼려두면, 거울이 더러워지듯 생명의 무명이 강해지는 시대다. 생명의 무명이 강해지면 삼독(三毒)이 강해져서 더욱 고뇌의 인생으로 전락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연마하는 이외에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되는 길은 없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연마하는 길이 바로 창제행이다. 창제행을 실천해 생명을 연마하면 '일념무명(一念無明)의 미심(迷心)'이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명경(明鏡)'과 같은 생명으로 바뀌게 된다. 즉 창제행이야말로 무명의 먼지를 없애고 법성의 광채를 더하는 생명 연마의 수행인 것이다. 또 대성인께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듯이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착실한 지속'이다. 말하자면 '도전'과 '지속'이 생명 연마의 중요한 점이라는 말씀이다. 남묘호렌게쿄의 창제행밖에 우리의 생명을 닦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남묘호렌게쿄는 우주와 생명 근원의 법이며 창제에는 묘법의 무한한 힘을 자신의 생명에 용현해 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남묘호렌게쿄의 창제행이 아니면 자신의 흉중에 잠들어 있는 남묘호렌게쿄 불계의 생명을 깨울 수 없다. 그리고 불계의 생명을 깨우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근원적으로 변혁하는 길로 통한다. 따라서 도전과 지속의 창제행을 관철하는 것이 일체의 생명변혁의 요점입니다. 즉 제목이 가장 중요한 결론이다. 이케다 SGI 회장은 다음과 같이 스피치하셨다.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이외의 유락은 없느니라'(어서 1143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마음껏 봉창할 수 있습니다. 실은 그 자체가 세계에서 가장 풍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제목을 봉창할 수 있다는 현실 그 자체가 최고로 행복한 경애입니다. 이런 저런 고민이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어도 진지하게 기원하며 신심을 관철하면 어떠한 숙명도 반드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중략) 중요한 것은 끝까지 신심 근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생성불의 신심과 창제를 근본으로, 자신의 생명을 갈고 닦아 일체를 승리의 방향으로 이끌어 갔으면 합니다. -화광신문 제871호, 201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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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케다 SGI 회장 일생성불초 강의 보기
제1회 일생성불 : http://cafe.daum.net/1ksgi/Clux/15
제2회 창제의 의의 : http://cafe.daum.net/1ksgi/Clux/14
제3회 己心(기심) : http://cafe.daum.net/1ksgi/Clux/13
제4회 (일념의 전환) : http://cafe.daum.net/1ksgi/Clux/12
제5회 용맹정진의 창제 : http://cafe.daum.net/1ksgi/Clux/11
제6회 기심(己心)의 묘(妙) : http://cafe.daum.net/1ksgi/Clux/10
제7회 일생성불의 신심 : http://cafe.daum.net/1ksgi/Clux/9
출처 : 교학 모임 (한국SGI 회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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