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일대사 혈맥초 강의
이케다 다이사쿠
제1회 생사일대사의 법
사제불이의 투쟁으로 민중에게 진실한 행복을
[강의]
'생사(生死)'란 인간에게는 가장 불가사의한 테마이고, 종교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과제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왜 태어나는가. 우연한 '삶'에 지나지 않는가. 아니면 어떤 목적이 부여됐는가. 또 '죽음'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많은 현대인이 막연히 생각하고 있듯이 무의미한 허무(虛無)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고대부터 내려 온 동서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같은 '빛나는 불멸의 영혼'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혹은 석존(釋尊)이 설했듯이 그 어느 것도 아닌지.
단견(斷見) * 상견(常見)을 초월한 불법의 지혜 <생사일대사혈맥초>는 이 '생사'에 관한 '근본적인 중대사'를 가르쳐 주신 어서입니다. 그것은 또 '불법의 진수'이고 '종교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일대사'라는 말은 그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에서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한 근본 목적을 '일대사 인연'이라고 설합니다. 그것은 일체중생에게 불지견을 열게 해서 성불시키는 것입니다. 대성인은 이 어서에서 가르치는 생사에 관한 근본적인 중대사는, 만인설불이라는 법화경의 이념에 깊이 통합니다.
석존의 깨달음 중에 '연기(緣起)'라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연기사상에서는 '노고(老苦)'나 '사고(死苦)', 즉 '늙음'과 '죽음'의 근본 원인이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명'을 소멸시키면 '늙음'이나 '죽음'의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석존이 깨달은 지혜는 죽음을 둘러싼 미혹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지혜였습니다. 석존은 이 지혜를 근본으로 생사에 관하여 잘못된 두 가지 생각을 부정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절대로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두 가지 생각 중 하나는 죽으면 '무(無)'로 돌아간다는 '단견(斷見)'입니다. 또 하나는 죽어도 불멸의 영혼이 이어진다는 '상견(常見)'입니다. 이 단견과 상견은 '태어난 후의 나'를 전제로 한 생사관, 즉 '지금 살아 있는 나'의 생사만 보는 사고방식이므로 생과 사를 대립하는 것으로 포착하는 데 그칩니다. 생사를 있는 그대로 본 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은 누구나 이 두 가지 생각을 어떤 형태로든 품고 있을 것입니다. '단견'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초래하고, '상견'은 내 몸을 아끼는 삶의 자세의 결론입니다. 니치렌 대성인께서는 <사도어서>에서 단견과 상견에 해당하는 사고방식은 인간을 진정 행복하게 하는 지혜가 아니라고 밝히셨습니다. 즉 "세간에서 사람이 무서워하는 것은 화염(火炎) 속과 도검(刀劍)의 섬광(閃光)과 자신의 죽음이니라. 우마(牛馬)조차 몸을 아끼는데 하물며 인신(人身)임에랴. 나인(癩人)도 또한 명(命)을 아끼는데 하물며 건장한 사람임에랴." (어서 956쪽)하시며, 공연히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에 집착하는 '세간의 삶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불법의 지혜'를 부처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가 설하여 가로되 '칠보(七寶)로써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꽉 차게 깔지라도 손의 새끼손가락을 가지고 불경(佛經)에 공양하느니만 못하니라.' 취의(趣意). 설산동자(雪山童子)가 몸을 던지고 요법범지(樂法梵志)가 몸의 가죽을 벗김은 신명(身命)보다 더 아까운 것이 없으므로 이것을 보시(布施)로 하여 불법을 배우면 반드시 부처가 된다." (어서 956쪽) 여기서 인용하신 부처의 말씀은 법화경 약왕품 경문의 중요한 뜻이며, 최고의 공양은 사람들이 아끼는 신명을 불법을 위해 바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것을 받아들여 설산동자와 요법범지처럼 불법을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는 삶을 영위함으로써 부처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최고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의 자세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이 어서에서 물고기나 새 들이 몸을 아끼는 나머지, 오히려 미끼에 속고 올가미에 걸려 목숨을 잃는 모습을 통해 단견 * 상견으로 이어지는 어리석은 삶의 자세를 밝히셨습니다. <사도어서>에서는 불법을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는 '삶의 자세'와 '행동'으로써 단견 * 상견을 초월하는 부처의 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이 점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태어난 후의 나'를 전제로 하는 생사의 사고방식은, '사후에 나는 없어지는가 아니면 이어지는가'라는 '의논(議論)'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죽음을 예리하게 의식하면서 죽음이나 죽은 후를 경험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의논'해도 최고의 지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으면 무(無)로 돌아간다'는 단견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묶인 불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자기 영혼은 불멸이라는 상견은 때때로 '지금의 내가 그대로 불멸이고 싶다'는 안이한 욕망을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높이는 지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에 대한 집착을 더하고 미혹을 깊게 하는 것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물론 세계의 많은 종교와 사상은 지금의 나를 초월하는 무언가 정신적인 것의 불멸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상은 죽음에 대한 무언가 안심시키는 효과는 있어도 삶의 자세는 높이는 최고의 지혜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도리어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자기 집착에 대한 미혹과 노고 * 사고에 속박된 삼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석존은 "여래(如來)의 생명이 사후에 이어지는가, 이어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답변이든 상대방을 높이기 위한 가르침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죽음을 둘러싼 미혹과 괴로움을 깊게 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성인은 <사도어서>에서 불법을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는 '삶의 자세' 때문에 탄압받는 문하(門下)들에게 밝히셨습니다. 즉 '나의 신명을 아끼지 않는다'는 각오로 사는 자세를 가르치시고, '정법(正法)을 아낀다'는 확고한 삶의 자세에 대한 근본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문하들을 '죽음을 둘러싼 미혹과 고뇌의 근본에 있는 편협한 자기집착'을 타파하고 '죽음을 둘러싼 미속과 고뇌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나게' 하려 하신 것으로 불 수 있습니다.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관념상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생과 사가 우주 자체의 영원하고 위대한 리듬이며, 그 리듬에 사는 위대한 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나의 생명을 지탱하는 근본적 약동으로 실감할 수 있을 때 죽음의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해방시키는 길이 바로 자행화타에 걸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입니다. 그리고 그 근본이 되는 생명관을 설한 것이 <생사일대사혈맥초>입니다.
묘호렌게쿄의 생사
대성인은 이 어서에서 '묘(妙)는 사(死)' 법(法)은 생(生)'이라고 설하고, 묘법 그 자체가 생사(生死)의 이법(二法)이라고 하시고, 더구나 이 모든 것이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생사(生死)'라고 밝히셨습니다. 이것은 생사가 본유(本有)의 법이라고 하시며, 이것을 통해 생사를 싫어하는 잘못, 혹은 생과 사 어느 한쪽에 집착하는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묘법은 영원한 법이고 무한한 법입니다. '생사 이법'은 이 영원한 법 자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사 이법'은 영원한 법의 리듬이며,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의 생사, 각종 현상의 출현과 소멸, 각종 차원(次元)의 인과(因果), 그리고 우주 전체의 조화와 약동으로 나타납니다. 이 '묘호렌게쿄의 생사'는 우리 생명의 근본인 일대사(一大事)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 위대한 생사를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문] ① 대저 생사일대사의 혈맥이라 함은 소위 묘호렌게쿄 이것이니라. 그 까닭은 석가 다보의 이불(二佛)이 보탑 안에서 상행보살에게 양여(讓與)하신 이 묘호렌게쿄의 오자는 과거원원겁으로부터 이래 촌시(寸時)도 떨어지지 않은 혈맥이니라. (어서 1336쪽) ② 묘(妙)는 사(死)요 법(法)은 생(生)이라. 이 생사 이법이 십계의 당체이며, 또 이를 당체연화(當體蓮華)라고도 하느니라. (어서 1336쪽) ③ 이와 같이 생사도 오직 묘호렌게쿄의 생사로다. (어서 1337쪽) ④ 석가 다보의 이불도 생사 이법이로다. (어서 1337쪽) ⑤ 그러하므로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존과 개성불도(皆成佛道)의 법화경가 우리들 중생의 셋은 전혀 차별이 없다고 깨달아서 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바를 생사일대사의 혈맥이라고 하느니라. (어서 1337쪽) ⑥ 결국 임종이 지금이라고 알아서 신심을 다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을 '시인명종위천불수수(是人命終爲千佛授手), 영불공포(令不恐怖) 불타악취(不墮惡趣)'라고 설하셨느니라. (어서 1337쪽) ⑦ 과거의 생사(生死)와 현재의 생사와 미래의 생사, 이 삼세의 생사에서 법화경과 떨어지지 않는 것을 법화(法華)의 혈맥상승(血脈相承)이라고 하느니라. (어서 1337쪽) |
'성불의 혈맥'을 전하는 불법의 사제 지금까지 이 어서의 주제(主題) 중 하나이고 제명(題名)인 '생사일대사'의 뜻을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은 주제이고 제명인 '혈맥'의 뜻에 대해 이 어서의 개요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 어서의 첫머리에 '생사일대사'의 법은 '묘호렌게쿄'이고, 그것은 석가(釋迦)와 다보(多寶)에게서 상행보살(上行菩薩)에게 계승된 '혈맥'에 따라 전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문 ① 참조) 앞에서 말했듯이 묘호렌게쿄는 오직 불법을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는다는 '삶의 자세' '행동'에 따라 생사일대사의 법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그 삶의 자세와 행동을 책임지고 나타내는 '스(師)승'으로서 상행보살의 이름을 드시고, 오직 이 스승과 사제불이(師弟不二)의 신심을 통해 '생사일대사의 혈맥'이 성립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묘법 자체가 '생사 이법'이고 모든 생명의 생사, 모든 현상의 출현과 소멸이 '묘호렌게쿄의 생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십계(十界)의 중생도, 석가와 다보 이불도, '묘호렌게쿄의 생사'입니다. (어문 ② ~ ④ 참조) 그리고 대성인은 이것들을 바탕으로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존(釋尊)'과 '개성불도(皆成佛道)의 법화경'과 '아등중생(我等衆生)' 이 셋은 묘호렌게쿄로서 전혀 차별이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생사일대사의 혈맥은 이것을 명확히 믿고 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신심을 통해 계승된다고 밝히셨습니다. 진실한 '부처'도 성불의 '법'도 다 함께 묘호렌게쿄이고, 더구나 나의 '기심(己心)'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제목을 부르는 신심이, 대성인의 불법에서 근본적 실천인 묘호렌게쿄를 수지(受持)하는 핵심입니다. (어문 ⑤ 참조) 또 대성인은 신심의 중요성을 '생사' 문제에 바탕을 두고 "임종이 지금이라고" 하는 신심의 자세를 가르치셨습니다. (어문 ⑥ 참조) 지금 죽음에 임해도 후회하지 않으며, 사고(死苦)를 유유히 극복할 수 있는 진실한 신심을 관철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신심을 금세에 끝까지 관철할 때, 과거세 * 현세 * 미래서 삼세에 걸쳐 법화경을 수지한 것이 됩니다. 거기에 그 사람의 법화경의 혈맥상승(血脈相承)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문 ⑦ 참조) 금세에 올바른 신심을 끝까지 '지속'할 때, 삼세에 걸친 생사의 반복이 생사일대사의 혈맥으로 일관하여 틀림없이 '묘호렌게쿄의 생사'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금세의 지속' '생애의 지속'이 중요합니다. 광선유포에 끝까지 살고 최후까지 신심의 정념(正念)을 관철했을 때, 그 모습 자체가 '일생성불'입니다. 그때 사(死)는 '생(生)의 단절(斷切)'이 아니라 '생(生)의 완성(完成)'이 됩니다. 그것은 '더욱 깊고 더욱 새로운 삶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그런 죽음에는 두려움이나 불안이 조금도 있을 리 없습니다. 참으로 '생도 환희' '사도 환희'입니다.
[어문] ⑧ 총하여 니치렌(日蓮)의 제자 단나(檀那) 등은 자타피차(自他彼此)라는 마음 없이 수어(水魚)라고 생각을 해서 이체동심(異體同心)이 되어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바를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血脈)이라고 하느니라. 덩구나 지금 니치렌이 홍통(弘通)하는 바의 구극(究極)은 이것이니라. 만약 그렇다면 광선유포(廣宣流布)의 대원(大願)도 이루어질 것이니라. (어서 1337쪽) ⑨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법화경(法華經)을 믿게 하여 성불하는 혈맥(血脈)을 잇게 해 주려고 하는데, 도리어 니치렌을 가지 가지의 난(難)을 당하게 하고 결국엔 이 섬에까지 유배했노라. 그런데 귀하는 니치렌에게 수순(隨順)하여 또 난을 당하시는 것이 심중(心中)으로 애석하게 여겨져서 가슴 아프도다. (어서 1337쪽) ⑩ 과거의 생사(生死)와 현재의 생사와 미래의 생사, 이 삼세의 생사에서 법화경과 떨어지지 않는 것을 법화(法華)의 혈맥상승(血脈相承)이라고 하느니라. (어서 1337쪽) |
광선유포의 대원과 사제 이상과 같이 이 어서의 전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묘호렌게쿄를 수지하고 상행보살의 제자, 즉 지용보살(地涌菩薩)로서 신심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요건을 제시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어서의 후반은 묘법의 수지하는 신심을 모든 사람에게 넓히는, 광선유포를 실천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즉 '광선유포의 대원(大願)'을 세워 이체동심(異體同心)으로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데에 생사일대사의 혈맥이 흐르며, 대성인이 홍통(弘通)하신 목적도 이 광선유포의 분투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문 ⑧ 참조) '광선유포의 대원'가 '성취'에 초점을 맞추면, '사제의 유대'와 '이체동심의 단결'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또 대성인이 열어주신 말법에 광선유포하는 길이 바로 일체중생이 부처가 되는 혈맥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어문 ⑨ 참조) 그리고 대성인의 제자로서 난을 극복한 사이렌보(最蓮房)와 사제의 숙연(宿緣)이 깊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어문 ⑩ 참조) 말법의 광선유포에서 사제불이의 길은, 제자가 스승과 똑같은 대원(大願)에 서서 어떠한 대난을 만나도 스승과 함께 신명을 아끼지 않고 투쟁하는 데 있습니다. 창가(創價)의 사제(師弟)가 니치렌 불법의 대도(大道)를 현대에 소생시켜 세계를 연결하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법체(法體)를 광선유포하신 스승은 말법만년에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남묘호렌게쿄를 나타내고 홍통하는 법칙과 묘법을 남기신 말법의 본불, 니치렌 대성인입니다. 이 대성인과 직결해서 대난을 극복해서, 대난을 극복하며 니치렌 불법을 세계에 넓혀온 불의불칙(佛意佛勅)의 화합승단(和合僧團)이 창가학회입니다. 광선유포는 모든 중생이 사고(死苦)를 극복하고 진실로 행복한 인생과 진실로 평화로운 세계를 실현하는 싸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성인이 홍통(弘通)하시는 의의(意義)입니다. 초대 회장 마키구치 선생님은 그 정신을 완벽하게 이어받아 순교(殉敎)하신 모습으로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신심을 끝까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마키구치 선생님과 불이(不二)의 분투를 관철하고, 창가의 이념을 실천해서 이체동심으로 화합승의 골격을 완성하신 분이 제2대 회장 도다 선생님입니다. 나도 니치렌 불법의 정수(精髓)인 인간주의와 평화주의를 내걸고, 내외에 걸친 대화와 행동으로 불법의 정신을 넓히며 사제의 대도를 외곬으로 달려왔습니다. 이 초대, 2대, 3대가 걸어온 길이 전 세계에 불법의 이념을 실천하는 혈맥이 되어 흐르면, 현대의 광선유포는 기초가 완성됩니다.
[어문] ⑪ 오직 남묘호렌게쿄 (南無妙法蓮華經) 석가(釋迦) 다보(多寶) 상행보살(上行菩薩) 혈맥상승(血脈相承)이라고 수행(修行)하시라. (어서 1337쪽) ⑫ 기필코 기필코 강성(强盛)한 대신력(大信力)을 다하여 남묘호렌게쿄, 임종정념(臨終正念)이라고 기념(祈念)하시라. 생사일대사의 혈맥은 이 외에 절대로 구하지 말지니라, 번뇌즉보리 * 생사즉열반이란 이것이로다. 신심(信心)의 혈맥(血脈)이 없이는 법화경을 가질지라도 무익(無益)하니라. (어서 1337쪽) |
혈맥의 본의는 '신심의 혈맥' 이 어서의 결론으로 '신심의 혈맥'을 강조하셨습니다. (어문 ⑪, ⑫ 참조) "신심의 혈맥이 없이는 법화경을 가질지라도 무익하니라." (어서 1338쪽) 지금부터 정확히 50년 전, 도다 선생님은 상승(常勝)의 천지 간사이에서 이 어서를 강의하셨습니다. (1956년 12월 11일, 오사카 나카노시마의 오사카 중앙 공회당에서) 선생님은 사랑하는 간사이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신심의 혈맥을 근본으로 참된 행복의 경애로 들어가세요!" 그리고 "사람들을 참된 행복경애에 들게 해주세요!"라고 정열에 넘쳐 강의하셨습니다. 스승과 함께 환희에 찬 묘법홍통을 실천할 것을 맹세함으로써 생사일대사의 혈맥이 현실사회 속에 흘러 넓혀집니다. 세계에 지용의 스크럼이 탄생한 지금, 나는 인류의 '생사혁명'이 실현되고, 평화와 인도와 행복의 혈맥이 도도히 흘러 전 인류의 경애가 변혁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사명을 세계의 동지에게 부탁드립니다. 우리 문하를 믿습니다. 특히 청년부에게 부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