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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톨스토이를 말한다

박청춘1 2011. 2. 17. 21:02

톨스토이를 말한다

이케다 다이사쿠

 

인생은 여행이다. 푸른 평원이 있는가 하면 눈보라 휘날리는 산도 있다. 어느 의미에서 인생은 고뇌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인간관계로 고뇌한다. 경제적으로 고뇌한다. 가정문제로 고뇌한다. 자기 자신의 일로 고뇌한다.

게다가 시대의 변화는 격심하다. ‘한치 앞을 못 보는 것’이 현실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어둠이 깊어도 아침이 오지 않는 밤은 없다. 겨울의 추위가 심할수록 따뜻한 봄을 맞는 기쁨은 크다.

누구든 극복해야 하는 인생의 산이 겹겹이 있으며 그것은 자기 자신을 찾아내는 여행이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여행이다.

톨스토이도 그러했다.

내가 청년시절부터 애독해 온 러시아 대문호다. 일찍이 모스크바에서 톨스토이의 집을 방문한 추억도 새롭다. (1981년)

나는 만년의 톨스토이 얼굴을 좋아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에도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에도 의연하게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간 승리의 얼굴. 참으로 좋은 얼굴이다.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얼굴이 되었을까. 그의 파란만장한 발자취를 더듬어 올라가면서 21세기를 끝까지 살아갈 ‘인생의 길’을 주시해 나가고자 한다.

톨스토이는 1828년 9월 9일(구력 8월 28일)에 태어났다.

나폴레옹과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여 러시아 민족의식이 고취되고 근대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시대다. 집안은 명문귀족. 모스크바에서 남쪽방향으로 2백㎞ 떨어진, ‘숲 속의 밝은 풀이 난 땅’이라는 의미의 ‘야스나야 폴랴나’가 집의 영지였다.

최근에는 모스크바에서 직통열차가 운행되고 있다고 들었다. 애칭 ‘톨스토이 급행’을 타고 3시간. 외국에서 방문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아 문호의 인기는 지금도 쇠하지 않은 듯하다.

모스크바에는 톨스토이 박물관이 있다. 레미조프 관장은 창가학회 인간주의 운동을 잘 알고 계시어 올해도 “톨스토이와 공통의 이념을 가진 창가의 여러분과 함께 세계평화를 위해 손을 맞잡고 나아가고 싶다”라고 도쿄후지미술관의 노구치(野口) 관장을 통해 전해 주셨다.

톨스토이는 다섯 남매 중 넷째 아들로 이름은 ‘레프’ 즉 ‘사자(獅子)’였다.

‘없는 것이 없다’는 부유한 생활. 현대로 치면, 1년간의 총수입은 90억원이라는 시산(試算)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두 살이 되기 전에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사망. 고모가 어머니를 대신했다.

어렸을 때, 의좋은 남매들은 ‘개미형제’ 놀이를 하며 놀았다. 그 때 니콜라이형이 가르쳐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적은 ‘녹색 지팡이’가 우리집 근방에 묻혀 있단다.”

톨스토이는 훗날, 이것을 회상하며 썼다. “지금도 나는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위대한 이상을 마음속으로 그린 어린 시절. 그 이상을 톨스토이는 평생 놓치지 않고 간직했다.

순수한 젊은 마음의 화폭에 무엇을 그리는가. 기쁨이 넘쳐흐르는 따뜻한 색채에 감싸인 마음은 행복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어른은 아이들이 안고 있는 ‘미래’를 바라보며 용기와 희망을 이야기했으면 한다.

인생의 목적을 찾아내고 싶다!

톨스토이가 여덟 살 때에 일가는 모스크바로 이사한다. 그런데 반년 후, 아버지가 노상에서 쓰러져 급사하고 만다.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그 사실을 소년은 오랜 세월 동안 믿을 수 없었다. 남매가 다 함께 매우 멀고도 먼 낯선 카잔에 있는 고모 집에 몸을 의지했다. 카잔은 현재, 러시아연방 타타르스탄공화국의 수도다.

15세가 되던 봄, 톨스토이는 카잔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렀지만 불합격. 가을에 재도전하여 간신히 합격했다.

성적은 좋지 않았다. 이른바 ‘암기과목’이 가장 싫었다.

그리고 18세 되던 봄.

톨스토이는 건강을 잃어 병원에 있었다. 결국 대학을 중퇴하고 말았다.

입원했을 때, 톨스토이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일기에 적었다. “만약 자기 인생의 목적을, 사람들과 공통된 유익한 목적을 (중략) 찾아내지 못하면 나는 인간들 중에 가장 불행한 남자이리라.”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 무렵 그는 인간이 만든 사회를 초월한 ‘근원적인 것’을 깊이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젊은 날에 일기를 썼다. 폐병으로 몸이 약한 자신을 질타하면서 곤란의 와중에서도 마음은 희망에 불타고 있었다.

이런 기술이 있다.

“톨스토이의 ‘일기’를 읽다. 위대한 문호일지라도 평생 고뇌의 연속이었다. 깊이 사념하는 것을 배우다.”

1950년 9월 18일.

도다(戶田) 선생님의 사업이 고경에 빠져 나도 혼신의 힘을 다 바쳐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쓴 일기다.

폭풍우에 처한 청춘, 그런 고뇌를 뚫고 나아가야 비로소 인생의 대도(大道)는 열린다.

18세인 톨스토이는 고향인 야스나야 폴랴나에 돌아왔다.

젊은 지주로서 농업경영을 시작했다. 그러나 덧없이 좌절한다.

모스크바에서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는 곧 좌절. 빚에 쪼들려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 형에게 보낸 편지에 자기 처지를 ‘어리석다! 어리석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리석다!’라고 책망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전진했다. 앞으로! 또 앞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기에는 열심히 해야 할 학문으로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그리고 법학, 의학, 농업경영 더 나아가 역사, 지리, 통계학, 수학, 음악, 그림 게다가 자연과학까지 언급했다.

도전 또 도전! 수 차례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문학 창작도 시작했다. 그것은 좌절만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작업이기도 했다.

‘도전’이야말로 청년의 특권이다. 목표를 가져야 할 것이다. 기원하는 것이다. 기원이 행동의 추진력이 된다. 용감한 행동이 불멸의 역사를 만든다.

젊음은 그 어떤 제왕일지라도 당해낼 수 없는 미(美)와 광채와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다.

고뇌하는 것은 성장하고 있는 증거다. 불법(佛法)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고 설한다.

신심의 불로 고뇌의 장작을 불태워 행복과 지혜의 광채는 빛난다.

남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고생을 해야 비로소 크나큰 인간이 될 수 있다.

타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고뇌는 인간혁명의 원동력이다.

신앙을 젊은 마음에

톨스토이가 22세이던 봄.

군대에 가 있던 형 니콜라이가 휴가를 받아 돌아왔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낀 카프카스(코카서스)의 전쟁터에서.

형이 전쟁터로 되돌아갈 때, 톨스토이는 갑자기 결심하고 함께 따라갔다.

처음엔 의용군으로 지원했다가 나중에 군대에 들어갔다.

신변에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생활. 잡일로 기분을 달래는 나날.

그는 인간의 마음의 심연(深淵)을 똑똑히 보았다. 강함도, 추악함도, 숭고함도.

그런 가운데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의 저작을 다시 읽었다. 특히 ‘에밀’에 감명을 받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애독하던 책이었다.

삶과 죽음을 응시한, 이 때의 진지한 사색이 그의 신앙의 토대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신앙을 실천하기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의 마음에 결정적인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톨스토이는 일기에 적었다. “양심은 최고, 최선의 길 안내자.” “인생의 목적은 선(善)이다. 이 감정은 우리의 혼(魂) 본래의 것이다.”

신앙을 갖는다. 양심에 따라 살아간다. 이것이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이다.

하물며 묘법은 우주와 생명을 꿰뚫는 법칙이다. 최고 선의 궤도다.

본질적으로는 불행의 원인도 자신이고 행복을 만드는 것도 자신이다.

어떤 고난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강한 자신, 지지 않는 자신을 위한 인간혁명이고, 승리의 인생을 쟁취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혼에 울려 퍼지는 말로

전쟁터 근처에서 톨스토이는 소설 집필에 몰두했다. 자신감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톨스토이는 독자를 향해 이렇게 썼다.

“노래를 부르는 데도 목에서 내는 소리는 부드럽지만 혼에 울려 퍼지지 않는다. 가슴으로 노래하면 세련되지 않더라도 울림이 강하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으로’만 쓰도록 노력했다.“

그 고투의 결정체가 소설 ‘유년시절’이다. 수 차례의 퇴고를 거듭했다. 결심을 하고 편집자에게 보냈다.

그러자 절찬을 받아 ‘동(同)시대 인물’ 잡지에 게재되었다.

독자의 반향은 컸다.

톨스토이는 드디어 작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이 때가 24세. 자기 사명의 길에 한 걸음 크게 내디딘 것이다.

인생은 드라마와 같은 것이다. 주역은 ‘자기 자신’, ‘지금 있는 장소’가 사명의 무대다.

누구든, 자기만이 해낼 수 있는 사명이 있다. 반드시 있다. 아니, 사명이 없으면 태어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자기답게 빛남을 가리켜 불법에서는 ‘자체현조(自體顯照)’라고 가르친다.

같은 형제인 인류가 어떻게!

카프카스의 산악지대 주민과 대국(大國) 러시아의 전투.

톨스토이는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

그는 소설 ‘침입’에서 질문을 던졌다.

정의(正義)가 러시아에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산악지대 주민과 싸워야 할 이유도 없이 그저 자신의 용감함을 나타내고 싶을 뿐인 러시아 장교에게 정의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와 처자가 숨어 있는 골짜기에 병사가 진격하는 것을 보고 ‘행복을 모조리 빼앗겨 버린다’고 분노하며 결사적으로 러시아 총검에 뛰어드는 카프카스의 남자들에게 정의가 있는 것인가.

어느 쪽에 정의가 있든 ‘닳아서 떨어진 속옷바지를 입은 순박한 노인’이 포로가 되고 ‘젊고 상냥한 예비 소위’가 피로 물들어 죽어간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전쟁?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노라’고 톨스토이는 썼다.

작가로서의 길이 열린 톨스토이는 군에 퇴직 신청을 했다.

때마침 그 무렵, 크림전쟁이 일어났다. 오스만투르크,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연합군과 러시아가 충돌하는 큰 전쟁이었다.

톨스토이는 마음을 바꾸고 크림반도로 향했다. 고생하여 겨우 당도한 곳은 최대 격전지인 세바스토플 요새였다.

이곳에서도 그는 보았다.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의 현실을.

남편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려다 도중에 폭탄을 맞아 다리를 잃은 아내가 있었다. 한쪽 팔이 없고 해골처럼 야윈 노병이 있었다.

참기 어려운 고통으로 신음하며 죽음을 기다리고만 있는 부상자가 있었다.

전황은 더욱 냉혹해졌다. 미래가 있는 청년들이 목숨을 빼앗겼다. 꽃이 피는 골짜기는 무수한 시체들로 메워졌다.

톨스토이는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기독교는 사랑과 자기 희생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적군도, 아군도 자신들이 한 일을 눈앞에서 보면서 왜 ‘회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릎 꿇으려 하지 않을까. 환희와 행복의 눈물로 형제로서 서로 껴안으려 하지 않을까.’

이것은 그의 일생에 일관된 의문이 되었다. 격심한 공방을 되풀이한 끝에 러시아군대의 요새는 함락되었다.

처음 전쟁터에 온 이후로 4년 반이 지난 때였다. 톨스토이는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쟁에서 체험한 강렬한 인상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 서로 죽이는 전쟁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오스만투르크와 연합한 영국도, 프랑스도 오로지 사람을 죽이는 능력이 더욱 늘고만 있지 않은가. 문명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시대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거대한 현실을 앞에 두고 그는 위축되지 않고 똑바로 민중의 행복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문명국을 이 눈으로 꼭 보자!

젊은 톨스토이는 유럽을 여행했다.

꽃의 도시, 파리를 방문한 28세의 톨스토이가 본 것은 ‘단두대(기요틴)’.

단두대로 공개사형하는 모습을 그는 눈앞에서 보았다. 심한 충격으로 밤에도 악몽에 시달렸다.

다음으로 스위스에 갔다. 거리에서 기타를 치는 사람이 반시간 정도 노래를 불렀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톨스토이는 감탄했다.

그러나 듣고 있던 관광객은 동냥도 주지 않는 데다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바보 취급을 하며 웃을 뿐. 그 대부분이 영국인이었다.

톨스토이는 격노했다.

‘가장 문명적인 나라’의 인간이 예술의 가치조차 모르다니! 같은 인간이 인간을 멸시하고 모욕하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너무 분한 나머지 일의 자초지종을 약 열흘 동안 단숨에 소설로 썼다.

과연 인간은 정말로 진보하는 것인가.

인간에 대해 성실한 감정을 갖지 않는 그 오만한 태도가 문명인가.

인류는 도덕적으로 진보하고 있지 않다

나는 토인비 박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려 본다. 20세기 최대의 역사학자인 박사가 말씀하셨다.

“인류의 도덕적 행위의 평균 수준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향상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문명사회가 이른바 원시사회보다도 도덕적으로 뛰어나다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박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바야흐로 인류가 단일가족으로서 함께 살아갈 길을 체득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합니다. 거리가 말살되고 원자력이 무기로 이용되는 오늘날의 상황하에서 인류가 집단자살을 모면할 길은 그 방법 이외에 점점 없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농민은 ‘농노(農奴)’ 즉 ‘노예’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단 말인가. 러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는 큰 문제였다.

톨스토이는 온갖 문제를 정신적인 면에서 가르쳤다. 농노제도는 ‘도덕적으로’ 나쁘다.

그러므로 폐지해야 한다.

지주였던 그는 스스로 시행착오하며 고심을 거듭해 정부보다 먼저 ‘농노해방’을 실행했다.

세계에는 가는 곳마다 차별이 있었다. 편견이 만연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답게 인생을 구가할 수 있는 사회를 향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 행보를 계속했다.

교육은 ‘보물찾기’

톨스토이는 민중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농민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자기집 안에 만들어 스스로 교단에 섰다. 교육에 관한 많은 논문도 썼다.

학교는 그의 인생을 통해 단속적이긴 하지만 계속 이어졌다.

이런 일도 있었다.

33세인 톨스토이 선생님이 말한다.

“그럼, 누군가 속담을 제목으로 하여 작문을 해 보세요.”

학생들 중 누군가가 “선생님이 직접 글을 지어 보세요.”

톨스토이도 지지는 않았다. “자, 누가 가장 잘 쓸까? 나와 여러분이 경쟁하는 거야.”

척척 써내는 아이들. 톨스토이는 아직도 쓰는 도중. 그럼, 선생님, 이야기를 이렇게 이어가면 어때요. 아니, 저렇게도 해 보면 어떨지 등으로 주문을 다는 아이들. 그 시(詩)적인 상상력에 톨스토이는 혀를 내두른다.

두 사내아이들이 밤늦게까지 남아서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합작으로 발표해야 되겠구나”라고 톨스토이가 말했을 때, 두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 톨스토이도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아이들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교육은 ‘보물찾기’와 같다고 그는 말한다. 톨스토이가 펴낸 교육잡지에는 괴테의 말이 실려 있었다.

“진보시키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진보되는 것이다.”

이 자유주의적인 학교를 헌병이 눈여겨보았다. 어느날, 갑자기 몰려들어와 학교는 일단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톨스토이는 격렬하게 화를 냈다. “엄청난 굴욕이다!” “나는 도망치거나 숨지 않는다.”

민중을 억압하는 자. 민중을 현명하고 강하게 그리고 생기 넘치게 만드는 자.

톨스토이의 인생을 건, 대결의 서막이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주변의 패거리가 모두 악인인 경우에는 집에 틀어박혀서는 안 되며 자기만 잘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을 억누르고 짓밟으려는 힘. 이것은 지금도 있다.

관리사회, 배금주의, 권력악(惡). 이들은 인간을 구분하고 분단하며 협소하게 만들어 살아갈 힘을 빼앗으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한없는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무상의 보물은 자기 자신 속에 있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문하인 아부쓰보(阿佛房)에게 말씀하셨다.

“아부쓰보가 바로 보탑이고 보탑이 바로 아부쓰보이며 이것 이외의 재각(才覺)은 무익하니라”(어서 1304쪽)

묘법을 수지한 자기 자신이 ‘보탑(寶塔)’이다. 자신의 생명이야말로 ‘보물 덩어리’다. 이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가르치신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무한한 보물을 이끌어내는 것이 불법(佛法)이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위대한 민중

톨스토이의 창조적 에너지는 34세 때에 소피야 부인이라는 좋은 반려를 얻어 본격적인 ‘문학’의 길로 향했다. 부인은 헌신적인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색에 잠기며 독자적인 스타일을 쌓아 올리면서 톨스토이는 30대 후반부터 41세 때까지 ‘전쟁과 평화’에 몰두해 나간다.

이야기의 무대는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러시아에서 말하는 ‘조국전쟁’에서 나폴레옹군을 격퇴했다.

이때의 승리에 얽힌 이야기가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켜 왔다는 사실을 톨스토이는 잘 알고 있었다.

‘전쟁과 평화’의 스케일은 거대하다. 퍼내고 퍼내도 끝이 없는 깊은 샘과 같은 명작이다.

마음에 깊이 남는 한 장면이 있다.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이 격심한 전투를 한창 벌이는 가운데 안드레이 공작이 전쟁터에서 쓰러졌다. 눈에 비치는 것은 오직 높은 하늘.

공작은 생각했다.

“이 뭐라 할 수 없는 정적함, 편안함 그리고 장엄함, 조금 전까지 달리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별천지다.”

“다 같이 달리고, 큰소리로 외치고, 싸우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프랑스병사와 포병이 증오심에 불탄, 두려워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막대기(洗桿: 포신을 청소하는 긴 막대기)를 서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높은 하늘, 끝없는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의 모양새는 전혀 다르다. 어째서 나는 지금까지 이 높은 하늘을 보지 못했을까.

그러나 마침내 그것을 깨달은 나는 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렇다! 이 끝없는 하늘 이외의 것은 일체가 허망에 지나지 않는다. 이 하늘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있는 것은 오직 정적(靜寂)과 평안뿐이다. 이것으로 좋다!….”

어리석은 전쟁을 언제까지 계속하고 있을 것인가, 인간들이여 하며 그렇게 하늘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역사의 격류 속에서 너무나도 작은 한 사람의 인간. 그것을 묘사하면서도 톨스토이의 필체는 참으로 밝고 힘차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야말로 인간의 바람직한 생활이다.

삶은 모든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 살아가는 것은 훌륭하다! 그가 노래하는 것은 힘찬 생명의 찬가다.

마지막 부분에서 피에르가 아내인 나타샤에게 하는 말은 그대로 세계를 향한 호소다.

“내가 말하는 것은 선(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서로 손을 잡자 그리고 선을 실천하는 것을 우리의 기치로 삼자는 것이다.”

“나는, 오직 위대한 결과를 낳은 사상이라는 것은 전부 간단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지. 그러니 나의 사상이라는 것은 만일 악인들이 단결하여 힘을 휘두르면 선인들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실로 간단하지 않은가!”

톨스토이는 학대받은 민중의 위대한 저력을 묘사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세계 민중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민중이다! 톨스토이의 외침은 영원하다.

무엇을 위해!

‘전쟁과 평화’를 완성할 무렵의 일이다. 톨스토이는 토지를 사기 위해 검분(檢分: 입회하여 실태를 검사함)하러 나갔다. 매우 멀어서 5일이나 걸리는 여행이었다.

오랜 여행 중에 톨스토이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점점 허무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디에 가는 걸까. 무엇을 위해’

어느날 밤, 공포에 휩싸였다. 그것을 나중에 ‘광인의 수기’(저서명)에 썼다.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염려하고 있단 말인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단 말인가)

‘바로 나지’ 죽음의 목소리가 소리도 없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 있지.’ 오싹해지는 한기와 함께 내 온몸의 털이 빳빳하게 섰다.”

톨스토이는 생각했다.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와 모든 것이 소멸하는데 이런 일을 하고 있어도 좋은 것인가. 인생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봐야 하리라!’

그렇게 절실히 느꼈다. 소설에서 높이 칭송한 이상을 어떻게 현실의 인생에서 살릴 것인가 하는 점에 직면한 것이다.

그는 칸트와 쇼펜하우어 등의 철학서를 탐독했다. 절대적 행복의 궤도를 진지하게 찾아다녔다.

진정한 행복이란

인생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다.

그럼,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내용은 사람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전쟁과 평화’를 집필하고 있었을 무렵부터 톨스토이는 둘째 형, 세르게이 그리고 여동생, 마리야의 결혼과 가정을 위해 열심히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남매가 정말로 행복해졌는지 그것은 모른다.

세르게이는 당시, 차별을 받는 민족의 여성과 결혼하여 이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 마리아는 가정생활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결국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전쟁과 평화’를 저술한 후, 45세에서 49세까지 집필한 ‘안나 카레리나’. 이 작품에는 순수하게 사랑을 추구한 까닭에 부조리한 사회에 짓눌리는 비극이 그려졌다.

이 장편이 쓰여진 배경에는 톨스토이 자신과 남매의 인생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온갖 행복도, 명성도 손에 쥐고 있던 주인공 안나. 남편과 미묘한 마음의 갈등에서 안나의 가정은 파괴되어 간다.

가장 사랑한 어린 아들과도 헤어지게 된다.

아들 생일날 몰래 만나러 간 안나는 쏟아지는 눈물로 가슴이 미어져 준비해 온 장난감을 건네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아들은, 이유는 몰랐지만 가장 좋아하는 어머니가 불행하며 괴로워하고 있다고 느꼈다.

사랑을 왜곡시키는 사회. 지각없는 편견. 안나는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더욱이 ‘안나 카레리나’의 마지막 장에서 남의 눈에는 행복의 절정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남편, 레빈이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왜 이곳에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인가를 알지 않고서 살아갈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 수 없다. 결국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사는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자살하기 직전, 벼랑 끝에 겨우 버티어 디디고 선다. 안나도 불행했다.

그러나 애정에 감싸인 레빈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럼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어려운 문제에 답을 준 것은 한 사람의 농민이 한 말이었다.

“혼(魂)을 위해 살아라!”

민중과 나눈 대화를 계기로 레빈은 신앙에 눈을 뜬다.

인간을 철저히 탐구한 톨스토이의 행보는 마침내 종교로 향하게 된다.

50세를 앞두고 톨스토이는 인생 최대의 ‘위기’에 부딪쳤다.

‘생사(生死)란 무엇인가‘라는 근본문제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보트에 태워져 강의 흐름에 맡겨 온 것과 같은 것이다.

본래는 강 건너 기슭을 목표로 노를 젓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흐름은 빨라 목적지를 잊고 말았다.

내 주위에는 그저 흐르는 대로 떠내려가 환성을 지르면서 미칠 듯이 기뻐하며 하류로 운반되는 뱃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하류의 여울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여울을 타게 되면 곧 보트는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사실, 박살이 난 보트도 보였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흐름을 거스르며 보트를 젓기 시작했다.“

톨스토이는 어릴 적에 양친을 여의었다. 존경하는 큰형 니콜라이도 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죽음’이라는 문제는 늘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것은 끊임없이 한곳에 계속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하나의 검은 얼룩이 되어 마음에 단단히 들러붙고 말았다.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자신이 사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살다가 죽는다. 나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어떻게 나는 자기를 구제해야 하는가?’

날마다 분주하게 지나간다. 영지를 관리한다. 아들을 교육한다. 글을 써서 큰 명성을 얻는다.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그게 무엇이 되는가?’

마음의 소리가 절규한다. 그러나 무엇 하나 대답할 수 없다.

‘답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톨스토이는 생각했다.

그는 종교, 사상, 철학 탐구를 개시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민중이 구제해 주었다

톨스토이는 사색에 사색을 거듭했다. 타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교전(敎典)도 정밀하게 연구했다. 그러나 답은 찾을 수 없다.

이윽고 그는 ‘가난하고 소박하며 학식도 없는 사람들 속에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 신앙은 생활에 결부되어 있었다. 없어서는 안 되는 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의 의의를 자각하여 삶도, 죽음도 마음 편안하게 흔들림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관념뿐인 학자나 위선의 성직자가 아니다. 민중 속에 톨스토이는 살아 있는 신앙을 보았다.

“민중이 나를 구제해 주었다”라는 톨스토이의 전기 속에서 로맹 롤랑은 통찰하고 있었다.

“생활과 신앙을 일치시키고 있는 단순한 사람들 속에 단연 몸을 던졌다.”

창가학회에도 무수한 민중의 ‘행복 박사’ ‘희망 박사‘ ’우정 박사’가 있다. 용감하고 위대한 ‘인간학의 교수’가 있다.

대학의 교수가 학력이 없는 한 부인에게 위대한 생명철학인 ‘교학’을 배우는 그런 아름다운 광경이 초창기 이후로 계속 있었다. 이것이 학회의 강함이며 긍지다.

궁극적으로 생사를 해결하는 길은 신앙밖에 없다. 니치렌(日蓮) 대성인께서는 “우선 죽음에 관하여 배우고 나중에 다른 것을 배워야 한다”(어서 1404쪽, 통해)라고 가르치셨다. 생사의 고통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것이 신앙이다.

행복이란 고난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난에 지지 않음을 말한다.

대성인께서는 “마음만이 중요하니라”(어서 1192쪽)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파도도 전부 승리를 향한 힘으로 만들어 금강불괴의 자기 자신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니치칸(日寬) 상인께서는 “우리는 묘법의 역용(力用)으로 즉 연조 대성인으로 나타나느니라”(당체의초 문단)라고 단언하셨다. 부처와 동등한 힘이 자신 속에서 솟는다. 여기에 신심의 가장 깊은 뜻이 있다. 법을 위해, 평화를 위해 행동하면서 ‘생(生)도 환희’ ‘사(死)도 환희’라며 영원한 행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자신이 바뀌면 가정이 바뀐다. 직장이 바뀐다. 지역이 바뀐다. 그것이 세계도 바꾸어 간다.

여기에 인간혁명이라는 희망의 방정식이 있다.

톨스토이가 종교를 탐구한 길을 쓴 자전적 소설이 ‘참회록’이다. 51세에 착수하여 53세에 완성했다.

‘참회록’에서 톨스토이는 선언했다.

“이제부터는 종교적 신념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의 자기 인생을 단호히 부정했다. 사회적인 영예가 정점에 달한 인간이 이른바 ‘나는 인생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공언한 것이다.

‘참회록’에서 톨스토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인생의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그는 민중 속에서 살아 있는 신앙을 발견했다. 그러나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점에는 아무리 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당시 러시아정교회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투쟁했다.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사형이나 전쟁을 실시해 온 사실을 엄중히 고발했다.

톨스토이는 성직자의 기만을 예리하게 폭로하고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종교’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와 결별했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었다.

러시아정교회는 국가 권력과 일체였기 때문이다.

당시, 성직자는 민중을 얕보고 있었다. 권력에 대드는 자는 엄하게 단속했다.

‘참회록’은 게재할 예정이던 잡지가 검열 받는 과정에서 삭제. 훗날, 스위스 제네바에서 발표되었다.

인간을 위한 종교. 인간의 위대함을 빛나게 하는 철학. 그것은 필연적으로 권력과 대결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측의 뜻대로 되지 않는, 자립한 정신만큼 성가신 것은 없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노트에 썼다.

“신앙은 적어도 그것이 신앙인 이상, 그 본질에서 볼 때 권력에 복종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작은 새는 살아 있다, 그리고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톨스토이의 ‘제2의 인생’은 거대한 권력과 투쟁이었다.

이제는 톨스토이에게 종교란 의식이나 형식이 아니고 특정 종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살아 있는 신념의 체계며 자립한 인간을 만드는 골격이었다.

톨스토이는 믿었다.

‘그 무엇에도 파괴되지 않는 행복은 신앙이 아니고서는 잡을 수 없다. 인간은 숭고한 정신성을 자각하지 않으면 동물적인 삶의 방식으로 타락하고 만다. 자기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고자 생각한다면 남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이다.’

보통은 은퇴할 만한 인생의 후반기. 톨스토이는 더욱 젊음이 넘치고 더욱 의기양양했다.

올바른 인생이란!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은!

톨스토이의 탐구는 더욱 깊어졌다.

그 사색의 결정(結晶)을 세계 사람들에게 열렬히 설했다.

민중을 위한 사상을 행동으로 옮긴다

톨스토이는 결심했다.

‘앞으로는 민중과 함께 살고 민중을 위해 민중 자신의 말로 알기 쉽게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출판사를 만들어 민중을 위한 잡지를 냈다. ‘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많은 민화도 발표했다.

재개한 학교에 심혈을 쏟았다.

가까이 사는 농민에게 병이 생기면 즉시 달려갔다.

의사를 부르고 딸에게 약을 마련하게 했다.

가난한 사람이나 고아를 위해 톨스토이 자신이 가래로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려 추수까지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쾌활하게 일했다.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레프 톨스토이가 우리 일동에게 전파하고 있던 바로 그 발랄한, 흔희작약한 기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앞이 가로막혀 있던 동료가 있었다.

톨스토이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옛날, 어느 곳에 황제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든 잘 안 됩니다. 그 점을 현자(賢者)에게 상담하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때와 가장 소중한 사람과 가장 중요한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에게 있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자 한 소녀가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때입니다. 누구보다도 필요한 것은 지금, 자신과 연관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일은 지금, 자신이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래저래 고민하기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금’을 후회 없이 살아라!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을 구제하라! 바로 이렇게 톨스토이는 가르친 것이다.

그는 이런 말도 써서 남겼다.

“냉혹한 사람들은 자신의 냉혹함을 변호하기 위해 항상 바쁘다고 말한다.”

톨스토이를 지지하며 돕는 사람이 모여들었다. 구도의 편지가 왔다.

21세의 프랑스 청년에게 편지 한 통이 왔다. 예술과 인생에 대해 고뇌를 거듭한 끝에 혼(魂)의 구제를 구하고 있었다.

이 무명의 한 청년에게 톨스토이는 실로 38쪽에 이르는 정성 어린 답장을 썼다. 청년은 감격했다. 그 청년이 나중에 대(大)작가가 된 로맹 롤랑이었다.

톨스토이는 기근을 구제하는 데에도 동분서주했다.

“나는 한가롭게 자기 집에 살며 저작에 열중하고 있을 수 없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완전무결하게 처리도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있는 것은 더더구나 할 수 없다.“

민중의 혼을 분기시키는 이외의 길은 없다는 것이 하나의 결론이었다.

톨스토이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 세계는 아름다우며 그리고 즐겁다. 우리는 이 세계를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 다음 세대를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더 아름답고 더 즐거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아니, 그리해야 할 책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좌담의 명인이었다. 농민과도, 문인과도, 어린이와도 차별을 두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인과 동지는 점점 더 늘어났다. 천객만래(千客萬來: 많은 손님이 번갈아 와서 끊이지 않음)였다.

고리키, 체호프와 같은 작가와 예술가는 물론 세계에서 민중운동의 지도자가 왔다. 훗날 체코의 철인(哲人) 대통령이 되는 마사리크도 왔다.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은 축음기를 선사했다.

아침저녁으로 두 차례, 말을 타고 산책하러 나가는 것이 일과였다. 겨울은 모스크바에서, 그 이외는 푸른 자연으로 둘러싸인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러시아 화가가 63세의 톨스토이와 나눈 추억을 이렇게 적었다.

어느 겨울날. “함께 가 보지 않겠습니까.” 톨스토이가 난민구호 활동으로 식량을 지원하는 곳에 데려가 주었다. 눈길을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갔다.

햇빛은 눈부셨지만 기온은 영하 25도. 톨스토이는 농민의 집을 한 집, 한 집 방문한다. 식량지원은 순조로운지, 부족한 것은 없는지, 주변 상황은 어떤지 등,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톨스토이는 무엇보다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귀가 길에 말이 끄는 썰매가 움푹 팬 땅에 빠졌다. 말은 머리만 쑥 내밀고 있었다. 자신들도 가슴까지 눈에 파묻혔다.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톨스토이는 입고 있던 모피 외투를 재빨리 내던지고 눈을 밟아 다지며 말에게 접근했다.

능숙하게 말을 다루어 썰매를 끄집어 올렸다. 그 뛰어난 솜씨! 화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 이것으로 됐다.”

톨스토이는 기쁜 듯이 웃었다.

그 뒤로 멋지게 고삐를 다루는 톨스토이의 솜씨로 썰매는 얼어붙은 돈강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려서 귀가했다. 흥겹게 예술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대의 흐름은 격심했다. 자유와 평등에 관한 민중 의식은 점점 더 높아졌다.

당국은 더욱 기를 쓰고 억누르려 했다.

이에 맞서 싸우는 가운데 톨스토이는 쓰고 또 쓰며 계속 썼다. 언론의 ‘사자(師子)’로서.

50대와 60대의 작품은 그 양이나 내용의 깊이 면에서도 대단한 것이다.

주요한 것만으로도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으랴’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인생론’ ‘크로이체르 소나타’ ‘신(神)의 나라는 그대 안에 있으리’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사회를 예리하게 비춰낸 작품들뿐이다.

이 중에서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으랴’는 지하출판(비합법적 출판)으로 확산되었다.

‘인생론’은 러시아 종무원이 발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신의 나라는 그대 안에 있으리’는 러시아에서는 발표되지 못하고 국외에서 발표되었다. 그 내용 속에서 톨스토이는 설했다.

전쟁이나 사형으로 대표되는 국가주의가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타락시켜 야수로 만들어 간다.

여러 나라의 국민들은 서로 평화로 맺어져야 한다. 그런데도 이성을 잃은 권력자 때문에 민족과 민족이 서로 전쟁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인정사정 없이 멸망시키려 하고 있다.

그런 악몽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나라를 위해?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라. 세계를 위해 살아라. 자신의 인간적 감정에 살아라. 종교적 신념에 살아라.

이런 톨스토이의 저작에 감격한 청년이 있었다. 부당한 차별과 투쟁하고 있던 간디다.

국내에서 발매금지가 된 책으로 인해 톨스토이의 세계적인 찬탄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박해야말로 위인의 증명이다.

제자도 박해를 받으며 투쟁했다

톨스토이의 책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베껴 쓰거나 몰래 인쇄하여 순식간에 퍼졌다.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어 붙잡히는 자도 있었다.

톨스토이는 내무부장관과 사법부장관에게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편지를 제출했다.

‘체포하려거든 나를 체포하라. 정부가 나를 추방하거나 투옥해도, 혹은 더 맹렬한 수단으로 나와도 상관없다’라며.

그러나 톨스토이의 세계적인 명성이 아주 대단하여 당국은 이를 갈면서도 손을 대지 못했다.

톨스토이를 대신하여 제자들이 박해를 받았다. 제자인 체르토코프는 국외로 추방되었다. 마찬가지로 제자인 브류코프도 8년간, 벽지로 추방되었다. 그는 나중에 후세의 거울이 되는 상세한 전기(傳記) ‘위대한 톨스토이’를 완성했다.

박해는 가혹해졌다. 권력과 하나가 된 종무원은 민중운동과 종교운동을 재기불능케하여 무산시키려 했다.

톨스토이는 비폭력과 불복종을 관철하는 두호보르 교도를 지원하며 황제에게 편지로 직소(直訴)했다.

딸인 타치야나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용감하게 동분서주하며 학대받는 사람에게 활로를 열어주었다.

톨스토이가 예술과 사상의 정수를 표현한 것이 ‘부활’이다.

직접 출판한 계기는 탄압받고 있던 두호보르 교도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61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완결한 것은 실로 71세 때. 1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단속적으로 쓰였다.

‘정말로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게 가능한가’ 이 점이 톨스토이가 물음을 던진 테마 중의 하나였다.

‘부활’에 이런 장면이 있다.

남자는 보았다.

죄수들이 시베리아를 향해 열차로 이송되는 가운데 마치 물건처럼 취급되는 현실을.

극심한 더위 속에 죄수는 제대로 물도 마시지 못하여 죽어갔다. 출산의 고통을 겪는 여죄수가 있어도 호송을 맡은 장교는 전혀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무서운 일이다. 그렇지만 어째서 이런 일이!

남자는 문득 생각났다.

‘이 세상에는 인간에 대한 인간적인 관계가 없어도 괜찮다는 그런 입장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겠지만 원래 그런 입장이란 있을 리 없다.’

‘애정 없이 접하는 경우를 자신에게 허용했을 때는 결국, 마침 오늘 보았듯이 인간관계의 냉혹함과 흉포함에 제한이 없어지며 또 지금까지의 일생을 통해 알게 된 것처럼 자기 자신의 고통도 무제한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 그대로다.’

톨스토이의 사색이 응결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톨스토이는 ‘우둔한 데다 도덕적 감각이 결여된 인간’의 대표적인 예로 당시 종무원장관을 다른 이름으로 하여 등장시켰다. 권력측이 노발대발하며 화를 낸 것도 당연했다.

톨스토이는 굳이 문학작품 속에 ‘사악하고 냉혹하고 무정하며 양심이 없는 노인’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각인을 한 것이다.

‘부활’의 클라이맥스(절정)에 달한 부분에서 늙은 농민이 말한다.

“나는 이름도, 집도, 조국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이다. ‘뭐라고 부르지’하고 물으면 인간이라고 부를 뿐이다.”

“황제는 자신이 황제며 나는 나로서 황제다.”

“자신이 자신의 주군이 되면 된다. 그러면 주군따윈 필요 없게 된다.”

실로 민중 왕자(王者)의 외침이다.

회사도, 학교도, 국가도 무엇 하나 인간 위에 있는 것은 없다. 누구나 ‘가장 존귀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빛나는 21세기로 만들고 싶다.

교사는 학생을 위해, 의사는 환자를 위해, 정치가는 국민을 위해 진력하는 것이 제일의 사명이다.

그런데도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는 인간도 있다. 여기에 잘못이 있다. 이 전도(轉倒)를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인권의 세기(世紀)’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난과 투쟁하는 사람과 함께 일어서다

인간애에 가득 찬 행동. 그것이 평화와 행복의 세계를 넓힌다.

니치렌(日蓮) 대성인께서는 고경(苦境)과 투쟁해 온 제자, 시조깅고(四條金吾)를 이렇게 격려하셨다.

“설령 귀하(깅고)의 죄가 깊어서 지옥에 떨어지는 그런 일이 있으면, 니치렌을 부처가 되라고 아무리 석가불이 권유하신다고 해도 따르지 않겠다. 당신과 함께 나는 지옥으로 들어가겠다.

니치렌과 귀하가 함께 지옥에 들어간다면 석가불도, 법화경도 반드시 지옥에 계실 것이다. 예를 들면, 어둠 속에 달이 들어가 주위를 비추는 것과 같고 더운물에 찬물을 넣어 식히는 것과 같으며, 얼음에 불을 지펴 녹여 버리는 것과 같고 태양에 어두움을 던져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지옥도 곧 적광토가 된다)“(어서 1173쪽, 통해)

이 얼마나 힘찬 말씀이신가. 괴로워하는 사람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는다. 같이 괴로워하며 함께 일어선다. 본불님의 대확신이 넘쳐흐르고 있다. 깅고는 얼마나 용기를 얻었을까.

생사를 초월하여 함께 정의의 길을 간다. 여기에 진실한 제자가 있다. 동지가 있다. 불법(佛法)의 혼이 있다. 한 인간을 구제하는 것은 위대한 용기와 자비와 격려다.

정의의 사람에게 찬동하는 민중 외침

‘부활’은 러시아에서는 정부의 입장이 불리한 부분을 검열과정에서 대폭 삭제했다.

그러나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거의 동시에 출판되었다.

전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권력에 대한 톨스토이의 투쟁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교회는 당황했다.

1901년. 톨스토이가 73세 때 교회는 일방적으로 그를 ‘파문’한 것이다.

파문 결정을 톨스토이는 신문에서 보았다. 다 읽고 나서 모자를 쓰고 여느 때처럼 산책하러 나갔다. 그는 태연했다.

오히려 그의 사상을 배운 사람들이 이 부당한 처사에 분노하여 격렬하게 항의했다.

세계는 톨스토이를 지지했다. 권력악과 투쟁하는 양심으로서. 결국, ‘파문’은 완전한 역효과였던 것이다.

톨스토이에게 비판적이던 평론가는 분한 듯이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톨스토이)를 저주하여 종무원이 그에게 결정을 내린다. 톨스토이가 이에 답변한다. 그 답변은 육필로 확산되어 외국 신문에까지 실린다. 누군가가 톨스토이에게 참견하고자 손을 쓰려 한다. 전세계가 떠들썩하게 일어나 러시아 당국은 꼬리를 사리고 만다.”

톨스토이에게 녹색유리로 된 문진이 도착했다. 유리공장의 노동자가 보낸 것이었다.

그것에는 모두의 서명과 함께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당신은 시대의 선구자인 수많은 위인들과 그 운명을 똑같이 하셨습니다. 전에는 이러한 선구자들이 장작더미에서 불태워지고 또 투옥되고 추방을 당한 가운데 허무하게 죽기 마련이었습니다.”

“러시아 인민은 당신을 자신들이 존귀하게 따르는 위인이라고 가르쳐 영원히 이를 긍지로 삼겠습니다.”

톨스토이를 지키기 위해 먼저 학생이 일어섰다. 정의를 부르짖었다. 학생들에게 민중이 편을 들었다.

파문소식이 신문에 실린 날. 톨스토이가 모스크바에서 산책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몹시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이봐, 저쪽에 사람가죽을 쓴 악마가 있잖아.”

그러나 뒤돌아본 수많은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태도로 일제히 외치기 시작했다.

“레프 톨스토이 백작 만세! 대(大)위인 만세!”

정의의 사람에게 찬동하는 어찌 할 수 없는 민중의 외침은 그칠 줄 몰랐다.

20세기, ‘전쟁의 세기’가 막을 열었다. 자각한 민중은 혁명을 추구했다.

분쟁이 불을 뿜었다.

거대한 폭력이 세계를 휩쓴다.

어째서 사람들은 서로 죽이는가.

어째서!

톨스토이는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한 때 병에 걸려 헛소리를 했다.

“세바스토폴리(지명)가 불타고 있다!”

마을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50년 전에 일어난 크림전쟁의 비극적인 광경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톨스토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자’는 긴 글을 집필하여 일본과 러시아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이대로는 인류가 절벽을 향해 맥진하여 멈추지 못한 채로 뛰어들고 만다.

애당초 예수도, 석가모니도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민중은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식은 바뀌고 있다.”

“현재의 큰 전쟁은 지금, 일본인과 러시아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아니고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백인종과 황인종의 전쟁도 아니고 지뢰, 폭탄, 총탄으로 하는 전쟁도 아니며 바로 지금 자각하고 있는 인류동포의 의식과 인류를 둘러싸고 압박을 가하는 어둠과 고뇌의 전쟁이다.“

인류동포의 의식, 이를 위해 톨스토이는 심혈을 기울였다.

인터넷도 텔레비전도 없는 시대에 톨스토이는 ‘세계시민의 마음’을 펼쳤다.

인류의 양심을 결집했다.

톨스토이만은 세계의 ‘정신적 지주’였다.

‘양심의 지주’였다.

1905년 피로 얼룩진 일요일 사건.

그리고 제1차 러시아혁명.

톨스토이는 홀로 묵직하게 버티어 서서 밀어닥치는 폭력의 탁류에 계속 저항했다.

1907년에 ‘한 사람도 죽이지 말지어다’, 1908년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를 써서 혁명가에 대한 피의 제재를 그만두라고 호소했다.

톨스토이는 절대평화주의에 입각하여 일체의 폭력을 부정했다.

마음의 연대는 끊지 못해

1908년, 톨스토이는 80세를 맞이했다.

정부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강해지는 가운데 맞이한 생일에는 국내외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축하편지가 왔다.

“전세계 민중의 마음을 하나로 맺어준, 진리를 위해 쉬지 않는 투사에게”라고 적은 사람은 모스크바 레이스공장 감독국에서 일하는 사람들.

에리티르치 공장의 노동자는 “우리는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를, 허위에 대한 진실의 승리를 믿는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라고 엮었다.

아무리 권력이 공갈해도 톨스토이와 민중의 마음 연대를 끊을 수 없었다.

인류의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는 그렇게 믿었다.

이를 위해 동서고금의 영지(英智)를 모은 잠언집 ‘글 읽는 나날’에 힘을 쏟았다.

1년 365일 매일 몇몇의 잠언을 소개하는 책이다.

나날이 알찬 내용의 사상에 접하여 자신의 마음을 고무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져 있었다.

톨스토이 자신의 다음과 같은 글도 있었다.

“신앙이 인생을 결정한다.”

“모든 것은 사상에 달려 있다.”

“선한 생각은 결국 선한 행위로 이어진다.”

“악한 사상은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악한 길로 끌어들인다.”

“종교란 만인이 이해할 수 있는 철학이다.”

“만인이 형제며 평등하고 차별 없다는 의식은 더욱더 인류 속으로 확산되고 있다.”

“현재와 같이 전 세계 여러 민족간에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 그저 자국에 대해서만 사랑을 설하고 언제 어느 때에도 타국과 전쟁을 할 태세를 갖추도록 설하고 있는 그것은 정확히 현재 화목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단순히 자기 마을만을 사랑하라고 설하고 각 마을에 군대를 모아 요새를 구축하는 것과 같다.

이전에는 한 나라의 국민을 하나로 맺은 조국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도 사람들이 이미 다양한 교통기관, 무역, 산업, 학문, 예술 특히 도덕적 의식으로 맺어져 있는 현대에 그것은 사람들을 결합시키지 못한 채 오히려 분열시킬 뿐이다.“

톨스토이의 최후는 ‘가출’이었다.

가출하면서도 주치의를 데리고 떠났다.

곧바로 셋째 딸과 그 우인이 합류하고 나중에 가족도 달려왔다.

왜 가출했는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가출은 멈춰 서지 않는 인생을 상징하고 있었다.

부(富)도, 안락도, 모든 세간적인 명성도 내던지고 진실한 길을 지향하는 그 속에 톨스토이의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SGI회장은 톨스토이의 가출과 사망에 대해 1990년 11월 3일, 창가교육동창의 모임에서 스피치했다)

가출하기 나흘 전, 톨스토이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사형을 반대하는 원고를 의뢰하는 편지였다.

톨스토이는 이에 응하여 가출한 행선지에서 원고를 완성했다. 그로부터 9일 후, 톨스토이는 역사(驛舍)에서 숨을 거두었다.

폐렴으로 인한 자연사였다.

관은 민중의 손으로 운반되었다.

(민중은) 성직자를 부르지 않았다.

수천 명이나 되는 청년, 농민, 지식인들이 이별을 아쉬워했다.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1910년 11월 7일.

82세였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로 치면 1백세에도 필적하는 장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으리라.

사형을 반대하는 글은 11월 13일에 ‘유효한 수단’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실로 생사를 초월하여 톨스토이는 권력과 투쟁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일기.

그것은 “이것이 내 계획이다. ‘이루어야 할 일을 이루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특히 내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이룬다).”

나와 타인이 서로 행복해지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쓴 글이었다.

동지를 위해서 최후까지

후회 없는 생애를 이룬 죽음은 장엄한 석양처럼 아름답다.

인생의 최후를 새빨간 석양처럼 빛나게 하고 싶다.

벗에게 희망의 빛을 보내면서 유연한 일생을 장식하고 싶다.

‘오늘도 광선유포를 위해!’

‘오늘도 동지를 위해!’라는 마음으로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의 몸을 다 불태운 사람은 반드시 영원한 대(大)공덕으로 감싸인다.

최후에 승리하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다. ‘정의의 길’은 멸하지 않는다.

‘진실의 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혼의 바통을 꽉 쥐고 달리는 ‘사자(師子)’가 있다면.

톨스토이는 일생을 걸고 민중의 마음에 ‘희망의 불’을 밝혔다.

그것은 20세기에 두 차례 세계대전이 일어났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인권을 짓밟는 거대한 악(惡)과 투쟁한 마하트마 간디.

그가 톨스토이의 저작을 읽은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감옥 속에서였다.

비폭력사상에 감명을 받아 수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숨을 거두기 2개월 전에 톨스토이는 간디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에게 세계의 끝이라고 여겨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트란스바르에서 벌이는 여러분의 활동이 오늘날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활동 가운데 가장 필수불가결하고도 중요한 것이 됩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자신들의 농장들 중 한곳을 ‘톨스토이 농원’이라고 이름 붙였다.

경애하는 톨스토이가 꼭 기뻐해 주리라는 마음을 담아.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귀국한 인도에서 간디는 목숨을 건 비폭력투쟁을 전개했다.

타오르는 정신의 불꽃은 번졌다.

이윽고 미국에서도 한 청년이 일어섰다.

마틴 루터 킹 박사. 공민권운동의 용감한 지도자다.

그는 말했다.

“나는 오랜 세월동안 추구해 온 사회개혁을 위한 방법을 간디가 이와 같이 강조한 사랑과 비폭력 속에 비로소 발견했다.”

매일 매일 계속해서 한 걸음씩

킹 박사가 흉탄에 쓰러진 미국 멤피스.

이 땅에 비폭력의 이상을 계승하는 사람이 있다. 마하트마의 손자인 아룬 간디씨다.

간디 비폭력연구소를 창립하여 소장을 맡고 계신다.

나도 두 차례 만나서 21세기를 주시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말했다.

“오늘 한 사람을 바꿀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내일은 두 사람을 그리고 모레는 세 사람…. 몇 명일지라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습니다. 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을 바꿀 것입니다.“

폭력이 없는 세계를 향해 우선 인간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톨스토이가 외치고 간디가 또 킹이 계승한 생명존엄의 이상.

비폭력에 의한 정신혁명.

그것을 실현하는 중대한 열쇠는 교육이다.

그리고 문화 교류, 민중과 민중의 마음의 교류를 거듭 확대해야 할 것이다.

이를 창가의 우리가 세계에 전개하고 있다.

지금,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주역은 민중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민중이 강해져야 할 것이다.

현명해져야 할 것이다.

위대한 인간혁명을 한 사람 또 한 사람 이렇게 이룩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마을까지 멉니까?’라는 통행인의 물음에 현자는 대답했다. ‘걸어가 보세요’라고.”

우선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걷기 시작하지 않고서는 얼마나 먼지 알 수 없다. 아니, 영구히 목적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걷는가, 걷지 않는가.

멈춰 서는가. 위대한 꿈을 향한 도전을 개시하는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우리는 창가의 길을 간다.

자신이 걸은 이 길은 전부 행복의 꽃이 핀다.

자신이 격려한 친구는 전부 영원한 보배로운 친구가 된다.

자신이 결정한 이 길은 인류의 비원인 평화의 길이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동지가 고난을 이겨내고 개척한 길이다.

오늘도 우리는 나아가고 싶다.

머리를 들고 가슴을 펴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인생의 길을!

세계의 벗과 어깨동무하면서 영원한 희망의 이 길을!

출처 : 창가광장
글쓴이 : 마당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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