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군(人間群) 속에서 "길"을 열어라 또 "력(力)"이란 부처가 가진 10가지 지혜의 힘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법문을 이해하는 능력을 아는 지혜의 힘이며, 사람들의 여러가지 소원을 아는 지혜의 힘, 사람들의 여러가지 경애를 아는 힘 등을 말한다. '십력(十力)'은 소위 '민중의 마음, 생명을 하는 힘'을 핵으로 하고 있다. 민중의 마음을 아는 '노력'의 결정(結晶)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부처는 이 '지혜의 힘'을 갖고 인간군 속에 '대환희의 길'을 개척해 갔다는 것이다. 석존은 스스로도 민중 속에 들어가고 제자에게도, 혼자서 포교를 위해 걷도록 호소했다. 대성인도 항상 민중을 향해 법을 계속 설하셨다. 민중 속을 걷지 않으면 민중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예를 들면 아쓰하라의 농민신도가 저 대법난에 굴하지 않고, 신심을 관철할 수 있었던 것도 닛코(日興)상인이 아쓰하라 지방에 철저히 다녔기 때문이다. 입신한지 얼마되지 않는 농민신도가 불법의 훌륭함, 대성인의 위대함을 알았던 것도, 닛코상인의 모습을 통해서이다. 그 닛코상인이 법난의 한가운데서 진두지휘를 하셨다. 미노부에 계시는 대성인에게 닛코상인으로부터 하나하나 보고가 들어왔다. 닛코상인이 '현장'에 계셨기 때문에 대성인은 정확한 '정보'를 아시게 되어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셨다. 난(難)의 와중에 있었던 신도의 마음의 창을 열고, 격려를 계속 보낼 수 있었다. 대성인과 닛코상인 두분이, 민중의 마음을 깊게 알고 있었던 것이 최대의 격려가 되어 아쓰하라의 신도는 법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시대도, 민중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이 승리의 근본이다. 모두의 마음을 알자, 사람의 생각을 알자, 민중의 노고를 알자. 거기에 최대의 노력을 해야만 진정한 리더이며 불법의 지도자이다.
부처의 자유자재의 경애를 밝히다 "무량, 무애, 력, 무소외, 선정, 해탈, 삼매가 있으며 깊이 무제(無際)에 들어가서 일체 미증유(未曾有)의 법을 성취했노라" 앞에서 "무량" "무애" "역" "무소외"는 부처가 법을 설하는 데 있어 자유자재의 경애를 나타낸다고 설명한 바 있다.
◆ 무소외 = 사자후의 언론전을 그 중 "무소외"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법을 설한다는 뜻이다. 설법에 임한 부처의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을 말한다. 여기에는 "사무소외(무외)"가 있다. 즉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단언하는 것(정등각무외). 묘법에 대한 대확신이다. 번뇌를 영원히 극복했다고 단언하는 것(누영진무외). 번뇌, 괴로움에 절대로 지지 않는다고 하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도(道)를 방해하는 번뇌, 장마(障魔)에 대해 설하는 것 (설자법무외). 삼장사마를 극복하도록 격려해 가는 것이다. 성불을 향한 길을 사람들에게 설하는 것(설출도무외). 여기에 행복의 길이 있다고 끝까지 호소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말할 때에 각각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이 "무소외"이다. 요컨대 '대확신에서 솟아나는 용기'이다. 불법을 홍통하면 반드시 난이 일어난다. 석존도 대성인도 그것을 알고 계셨지만 종교계의 권위나 정치권력자 등에게 당당히 사자후의 언론전을 전개하셨다. 그것이 "무소외"이다. 또 대성인은 문하에게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호소하셨다. "니치렌의 제자는 겁장이로서는 이룰 수 없다는 일" (어서 840쪽)이라고 하시며, 남묘호렌게쿄의 대음성으로 정의를 끝까지 말해 가시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법화경 용출품에 설재져 있는 "교어난문답 기심무소외"(개결 493쪽) - 어려운 문답에 뛰어나며 그 마음 두려워하는 바 없느니라 - 의 정신은 거기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용출품의 경문에는 지용의 보살이 난문답 즉 어려운 법론에 아주 능하여서 상대를 두려워하는 마음 같은 것을 전혀 없다고 설해져 있다. 지용의 보살은 문답에 아주 능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강적일지라도 용감하게 맞서갔다. 두려워하고 있어서는 상대의 마음에 울리지 않는다. 또 지혜도 솟지 않을 것이다.
◆ 홍교의 사람을 소중하게 이것이 부처의 마음 닛코상인은 "교어난문답의 행자에 있어서는 선사(先師)와 같이 소중히 해야 할 것" (어서 1619쪽) - 난문답에 아주 능한 행자에게는 선사(니치렌 대성인)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칭찬하고 소중히 해 가시오 - 라고 말씀하셨다. 홍교하는 사람을 더할 나위없이 소중하라. 그것이 니치렌 대성인의 마음이시고 닛코상인의 명령이었다. 지금 종문은 그 가르침을 걷어차고 짓밟아, 미증유의 '홍교의 사람'의 모임인 창가학회를 박해한 것이다. 웅변의 사람은 광포의 보배이다. 그리고 진정한 웅변이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납득시키는 힘이다. 어떠한 대학자라도 설득할 수 없었던 상대가 부인부의 한마디에 납득해 버린다. 이러한 광경이 우리 창가학회에서는 드물지 않다. 이것이 지혜의 힘이고 인격의 힘, 신심의 힘이다. 여러분은 지금까찌도 중상의 폭풍속, 오만한 비판의 바람도 무서워하지 않고 끈기있는 정의의 대화를 펼쳐 오셨다. 여러분이야말로 "무소외"의 사람, "교어난문답"의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종횡무진, 자유자재로 인간 속에 방편품의 글월에서는 계속해서 부처가 "선정" "해탈" "삼매"를 구비하고 있고, 깨달음의 경지에 깊이 들어가서 일찍이 없던 대법(大法)을 체득했다고 설해져 있다. 이와 같은 확고부동한 경지에 있기 때문에 부처는 종횡무진, 자유자재로 민중 속에서 법을 계속해서 설해갈 수 있었다.
◆ 부처는 "민중을 위해 고뇌하고" 대법을 홍통 앉아서 명상만 하는 부처는 없다. 민중을 위해 고뇌하고 행동하고 사람들의 괴로움을 해결해야만 부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광포 도상(途上)의 여러 문제로 고뇌하고 그것을 위해 기원하고 있는 그 자세야말로 존귀하다. 하루하루 벗을 위해, 광선유포를 위해, 인재육성을 위해 고뇌하고 계신다. 고뇌하는 것이 보살이다. 고뇌해야만 부처의 경애가 될 수 있다. 또 광포에 도전하는 모습 자체가 이미 부처의 행동에 통한다. 전회(前回)에 말했듯이 이 경문에 나타나 있는 '부처의 지혜' '부처의 힘'은 어본존의 경애이고, 어본존을 수지하는 우리들도 이 경애로 될 수 있다. 또 "선정" "해탈" "삼매" 등이 지금으로 말하면 근행 * 창제에 포함된다는 것도 이미 말한대로이다. 즉 우리들이 광포를 위해 진지하게 고뇌한 몫만큼, 어본존께 제목을 올린 몫 이러한 제불(諸佛)의 지혜와 힘이 전신에 넘쳐 흐른다. 그렇게 되어야만 이 경문을 몸으로 읽은 것에 통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경지라고 해도 일찍이 없는 지혜라고 해도 구체적으로는 '어본존에 대한 대확신' 이외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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