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영원히 배우고 승리하는 여성> 퀴리부인을 말한다 <1>

박청춘1 2010. 1. 12. 23:24

 

 사명을 자각하면 희망과 용기가 생긴다!
 
훌륭한 청춘의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나는 행복하네
나는 다정한 벗이여
이처럼 순수하고
조화로운 그대의 목소리가
나의 꿈을
요람처럼
흔들어 주면서 노래할 때
나는 행복하네
나는 행복하네"
 
"인생을 위해
그대가 더욱 좋은 사람으로
되겠다고 내게 약속할 때
나는 행복하네"
 
이 글은 대과학자이며 풍부한 시심을 겸비한 여서 마리 퀴리(1867 - 1934년)가 남긴 시 한 구절입니다.
나와 아내의 '꿈'은 창가교육(倉價敎育)의 창시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선생님 그리고 도다 조세이 선생님의 '꿈'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꿈' 중의 하나가 여성교육의 전당인 소카여자단기대학을 창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아내는 이 단대의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올바른 인생' '행복한 인생' '승리의 인생'으로 '영광의 청춘'을 마음껏 펼치는 여러분을 지켜 보는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사시사철 격려를 보내는 동상
우리 소카여자단기대학에 있는 '문학의 뜰'에는 퀴리 부인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어깨를 펴고 진지하게 탐구하는 눈빛으로 손에 든 플라스크를 일심불란하게 주시하고 있습니다. 벚꽃이 만발한 화창한 날에도, 천둥이 치며 비오는 날에도,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에도 그리고 흰 눈이 휘날리는 날에도 배우고 승리하는 모습으로 사시사철을 향학에 힘쓰는 우리 단대생을 끊임없이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높이 2.5미터, 받침대 1.5미터인 동상은 미국의 기예(氣銳)의 조각가 지아노티 씨가 1915년 때의 사진을 보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제작한 것입니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마리 퀴리가 방사선 치료반을 조직하여 부상병 간호로 분주했던 시기에 찍은 모습입니다.
이 동상의 제막식은 1994년 봄 4월 4일에 열렸습니다.
기증해 주신 브라스너 박사 부부와 함께 나와 아내도 참석했습니다. 제막식에 참석한 단대생들이 기뻐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나는 정말 기뻤습니다.
마리 퀴리는 1867년 11월 7일생입니다.
'창가교육의 아버지'인 마키구치 선생님이 탄생하신 때가 1871년 6월 6일이므로 거의 같은 세대입니다.
내 은사인 도다 선생님도 마키구치 선생님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 쿠리 부인의 발자취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모범 여성이라고 대단히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단대에 퀴리 동상을 설치한 연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 행동의 모든 기점은 스승에 대한 보은이며 스승의 구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은사의 슬하에서 젊은 시절, 잡지 '소년 일본'의 편집장을 맡아 퀴리 부인의 고심'이라는 제목으로 전기(傳記)를 게재한 적도 있습니다.
이 동상 제막이 있고 나서 4년 뒤인 1998년 가을에 단대생 대표가, 일본을 방문 중인 마리 퀴리의 손녀이자 핵물리학자이기도 한 엘렌 랑주벵 졸리오 여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단대에 퀴리 동상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매우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이번 강좌는 이 동상 앞에서 느긋하게 간담하는 마음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첫 여성
새삼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마리 퀴리는 인류사에 널리 빛나는 굴지의 대과학자입니다.
1903년에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남편인 피에르 퀴리, 프랑스 물리학자인 앙리 베크렐과 공동수상)
여성으로서 첫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첫 수상 이후 8년이 지난 1911년에는 노벨화학상을 단독으로 받았습니다.
두 가지 노벨상을 처음으로 받은 사람도 퀴리입니다.
더군다나 그 인격은 그러한 '세평(世評)'에 전혀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도 "유명한 사람들 중에 마리 퀴리 한 사라만이 그 명성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은 인물이다."라며 감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해 널리 민중은 퀴리를 깊이 경애했습니다.
프랑스 우인이 말해 준 내용입니다만, 5년 전(2003년)에 프랑스의 조사(調査) 회사가 유럽 6개국(독일, 스페인,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폴란다)의 거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역사의 인물은 누구인지' 묻는 설문 조사를 벌였습니다.
영국의 처칠 총리,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 등 역사상 쟁쟁한 거인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거기서 통행인 6000명이 가장 많이 맨 처음 말한 이름은 대체 누구였을까? 바로 마리 퀴리였다고 합니다.
2006년 11월 프랑스에서는 '마리 퀴리기념주화(20유로짜리 금화와 은화)'가 발행되었습니다.
이것은 1906년 11월 퀴리가, 죽은 남편 피에르를 대신해 여성으로는 최초로 파리대학교 교단에 섰는데 그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지난해에는 파리 시내를 달리는 지하철의 한 역이 개장공사를 마치고 오픈할 때 '피에르 에 마리 퀴리역'이라고 부부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연관 된 것입니다.
마리 퀴리라는 존재는 그 남편인 피에르와 함께 지금도 사람들 마음속에 생생하게 계속 살아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생애
지금부터 36년 전인 1972년 4월 30일 아침 때였습니다. 20세기 최고 역사가인 토인비 박사와 내가 대담을 시작하기 닷새 전의 일이었습니다.
나와 아내는 프랑스 우인과 함께 파리 교외에 있는 마리 퀴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지붕이 빨간 3층집입니다. 그곳에 마련된 명판에는 1907년부터 1912년 사이에 마리 퀴리가 살았다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집에서 산 기간은, 마리가 가장 사랑하고 둘도 없는 학문 연구의 동지인 남편 피에르를 여윈 직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또 부당한 박해 등 숱한 시련을 극복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1910년 '금속 라듐의 분리'에 성공하고 그 이듬해 노벨화학상의 영예를 안은 것도 이 집에서 지낼 때였습니다.
나는 집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마리 퀴리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떠올렸습니다. 태어났을 때는 조국 폴란드가 이미 외국의 압제를 받던 시대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 언니와 잇따라 사별하는 슬픔을 겪였습니다.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허용되지 않아 불우한 환경에서 꾹 참으면서 배운 청춘 시절이었습니다.
부모 슬하를 떠난 큰 도회지로 유학해 가난에 허덕이며 매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도 있었습니다. 비열한 질투에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압박까지 받았습니다.
더욱이 사랑하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이별, 그리고 전쟁, 병… … .
절망한 나머지 살아갈 의욕마저 잃을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퀴리는 가까스로 버텨 냈습니다.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고난을 물리쳤습니다.
나는, 아내와 함께 나란히 걷고 있던 상쾌해 보이는 프랑스 창가학회 여성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나는 마리 퀴리의 위대함이, 두 가지 노벨상을 받았다는 점보다는 바로 '비애에 지지 않는 강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풍에 돛 단 듯한 인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려움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자기 생명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곳에 희망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때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고개를 깊이 끄덕인 그 여성도 다기찬 사명의 인생을, 강철 같은 신념을 지닌 남편과 함께 희망에 불타 꿋꿋하게 나아겼습니다. 지금은 세 자녀 분들도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명의 길을 계승해 사회에서 훌륭하게 활약하고 있습니다.
 
투쟁하는 용기, 견뎌 내는 용기를!
마리 퀴리는 청춘 시절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제1원칙, 누구에게도 무슨 일에도 결코 지지 않을 것."
'결코 지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퀴리의 일생을 일관한 금강 같은 일념입니다. 이 점을 확고히 정한 인생은 강합니다.
내 아내의 모토도 '이기지 않아도 되니까 지지 않을 것" "어떠한 사태나 상황이 되어도 지지 않는 일생을"입니다.
전쟁 때 마키구치 선생님은 특별고등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당당하게 정의의 신념을 끝까지 외쳤습니다.
아내는 그러한 사자왕과 같은 모습을 어릴 적 집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직접 보고 생명에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으신 도다 선생님을 인생의 스승으로 받들어 '지지 않을 것'을 철칙으로 삼아 묵묵히 사명을 다했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마리 퀴리를 추억하는 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매우 지적인 작업 면에서 퀴리가 무엇을 달성했는가 하는 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 한 세대에 그리고 역사에 한 힉을 긋는 것으로서 바로 걸출한 인견의 내면적인 질(質)이 아니겠습니까."
퀴리의 걸출한 인견의 특질은 첫째로 '지지 않은 용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용기'가 없으면 아무리 인품이 좋아도 사람들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투쟁하는 용기!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견뎌 내는 용기!
이러한 용기를 마리 퀴리는 어떻게 단련하고 어떻게 끄집어 냈을까.
나와 아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과 같은 소카여자단기대학 학생 또 소카대학교와 미국 소카대학교 여학생 게다가 소카학원 여학생 여러분 그리고 학회의 모든 여성에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또 단대 입학시험에 응시한 분들은 모두가 평생 단대의 자매입니다.
시험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합격 * 불합격은 있습니다.
그러나 단대라는 곳에 와서 분투한 그 자체는 엄연히 생명에 남습니다. 그것은 평생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명랑하게 생명의 왕녀로서 긍지를 안고 당당하게 '영광의 청춘'을 꿋꿋이 살아가기 바랍니다.
우리 부부는 소카여자단대 입학시험에 응시하신 여러분 전원의 승리와 행복한 인생을 진지하게 기원하고 있습니다.
마리 퀴리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바뀌는 전환기를, 바로 그 동상의 모습처럼 의연하게 머리를 들고 가슴을 펴고 꿋꿋하게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또한 배우고 승리하는 장한 모습으로 20세기에서 21세기로 바뀌는 전환기를 꿋꿋이 살아, 불멸의 역사를 창조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인류의 희망으로 빛날 '여성의 세기'의 아침 해와 같은 리더이기 때문입니다.
 
향학심에 불타 꽃의 도시 파리로
프랑스의 동북유럽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가 꽃의 도시 파리 북역(北驛)입니다.
나도 이 파리 북역에서 급행 열차를 타고 5시간 걸려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으로 떠난 추억이 있습니다. 25년 전인 1983년 6월 25일입니다.
우리가 탄 '북극성' 호는 저녁에 출발하여 도중에 정차한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일부러 나와서 기다려 준 동지와 함께 플렛품에서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다음 역인 앤트워프역에서도 정차시간이 불과 1분이었는데 창 너머 동지와 마음을 주고 받았던 그때가 지금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시대는 19세기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91년 11월 이른 아침, 파리 북역 플랫품에 열차가 도착했습니다.
긴 여행으로 지친 많은 승객과 함께, 한 젊은 여성이 짐을 들고 내렸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사흘 동안 계속 4등칸을 타고 왔기에 피로하지 않을 리 없었습니다.
옷차림도 검소했습니다. 처음 접하는 큰 도회지, 낯선 사람들,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뜨겁고 뜨거운 향학(向學)의 혼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소녀가 바로 젊은 날의 마리 퀴리입니다.
내 가슴에는 자랑스러운 그 '첫걸음'을 내딛는 발소리가, 기숙사생을 비롯해 부모 곁을 떠나 내가 창립한 대학교에 들어오신 학생 여러분 그리고 유학생 여러분의 결의에 찬 발소리와 오버랩되어 울려 퍼집니다.
이때 퀴리는 스물세 살, 여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이미 8년이 지난 상태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대학을 졸업할 나이입니다. 집안 살림과 학비 문제 등, 유학이 가능하도록 그 환경을 갖추기까지 그 만큼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타국 지배하에서 보낸 소녀시절
학생 때에는 이른바 재수나 유급, 휴학 등 여러 사정으로 남보다 햇수가 더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과 비교하여 끙끙 앓은 필요는 없습니다. 인생의 싸움은 시간적으로 깁니다. 도중의 상황에 따라 일희일우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후에 이기면 되기 때문입니다.
청춘의 생명에 실망은 없습니다.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거듭 노력하며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하고, 또 반드시 기쁨을 드리는 사람이 되어 효도해야 합니다. 이 점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유학할 때까지 마리 퀴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마리는 1867년 11월에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 시대가 끝나고 대정봉환(大政奉還: 막부 시대가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하는 일)이 일어난 메이지유신 시대에 해당합니다.
두 분 다 뛰어난 교육자인 아버지와 어머니 슬하에서 다섯 남매 중 막내로 태아났습니다. 태어났을 때 이름은 마리아 스쿼도프스카, 남매는 언니 세 명과 오빠 한 명이며 '마냐'라는 애칭으로 불렸습니다.
이 바르샤바 생가 바로 옆에는 마르케비치 폴란드SGI 부인부장 댁이 있습니다. 부인부장 댁에서는 언제나  지역의 좌담회가 활기차게 열려 평화와 행복을 추고하는 알찬 대화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마냐가 태어났을 당시, 사랑하는 조국 폴란드는 제정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폴란드 역사와 말을 가르치지 못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고 굴욕적인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마냐가 다닌 학교에도 장학사가 빈번하게 찾아와서는 교육 내용을 엄중하게 감시했습니다.
만일 자국 폴란드어로 말하거나 하면 자기뿐만 아니라 부모에게까지 위험이 닥쳤습니다. 그런 혹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냐의 마음이 비굴해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배려심이 많고 따뜻한 가족의 유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공부에 대해서는 대단히 노력가로 남에게 가르치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최신 과학에 정통했고 아울러 여러 나라 말도 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도 20대에 여학교 교장을 지내는 등 참으로 교양있는 여성이었습니다. 마냐는 이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해 마지않았습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괴로운 일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집에 가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가족이 서로 격려하고 지켜 줄 수 있습니다.
그러한 화락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 사회의 가장 소중한 기반이자 평화의 원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뭐니 무니 해도 딸인 여러분의 총명함과 밝게 웃는 얼굴은 가족을 비추는 태양빛이며 화락을 구축하는 큰 힘입니다.
마리 퀴리는 훗날 언니에게 "가족이 서로 결합하는 것은 정말로 이 세상의 유일한 행복이지요."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가족의 결합은 서로 함께 인생의 시련에 맞서 나아가는 속에 깊어지고 강해지며 그리고 영원성의 차원으로까지 끌어 올려집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초월하여
마냐는 아직 열 살일 때, 생각지도 못한 슬픔을 겪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가 결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마흔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였습니다.
실은 그 2년 전에 병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을 꾸려 나간, 다정한 큰언니도 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었습니다.
가족의 잇따른 죽음에 집안은 풀이 죽었습니다. 어린 마냐는 견디다 못해 방구석에 앉아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은 슬픔은 매우 큽니다. 그러나 먀냐는 훗날 스스로 확고히 세운 '제1원칙'대로 결코 지지 않았습니다.
"괴로움 없이 정신적 성장은 있을 수 없으며 삶의 확충도 불가능하다." 이는 자신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말입니다.
소카학원 초창기 때, 나는 어머니를 여읜 중학생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생에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단다. 그 시기가 이른가 늦은가가 다를 뿐이지.
깊은 슬픈을 안고 큰 고뇌에 괴로워하면서 이를 극복해야 비로소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단다. 위인은 다 그래요. 그러니 우리 학생도 절대로 지지 말고 힘내요."
이 말대로 그 중학생은 모교를 '어머니'라고 생각하면서 소카학원생답게 큰 산을 넘어갔습니다.
한 사람의 승리는 죽은 가족의 승리며 한 가정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고난을 극복하고 전진한 발자취는 미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 화광신문 778호, 080425 -

 

출처 : 한국 SGI 교학 모임
글쓴이 : 一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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